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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영화<그린북>리뷰맞잡은 손의 따뜻함과 평등의 발견
김 풍 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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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 사회적 불평등의 상징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선택한 영화 <그린 북>(Green Book, 2018)이 코미디 장르인 줄 알았다. 자신이 일하던 술집에서 손님을 때린 뒤 해고를 당한 토니 발레룽가가 피아니스트인 돈 셜리의 운전기사 자리를 소개 받아 그의 집으로 면접하러 간 장면 때문이었다. 자신도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탈리아계 사람이면서 흑인에 대한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니(자기 집에 일을 하러 온 흑인이 마신 컵을 슬며시 들어서 쓰레기통에 넣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셜리를 보자마자 그냥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면접에 응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앉은 자리의 배치를 보면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왕이 금빛 왕좌에 앉아 있는 것처럼 도도하게 근엄하게 자리해 있는 셜리와, 한 단계 아래 거실에 놓인 의자에 앉은 토니의 모습은 너무도 뜬금없었다. 대체로 웃음이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순간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그들의 지위를 다양한 방식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흑인이 윗자리에 앉아 있는 배치는 여러 모로 사회의 모순을 비틀어서 표현한 것이다. 이 구도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이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 미국 사회가 형성하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들을 비틀어 놓았다는 점을 떠올렸다.

토니는 가난하면서 골목의 부랑아로 살아온, 그리하여 배운 것도 없어서 거칠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 셜리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 최고의 문화적 소양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음악가이다. 일견 백인과 흑인의 구도로 보일 법한 두 성향은 왕좌에 앉은 흑인과 거실 바닥 의자에 앉은 백인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앞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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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인 <그린 북>(green book)은 미국을 여행하는 흑인들을 위한 일종의 안내서다. 뉴욕의 우편배달부였던 빅터 휴고 그린(Victor Hugo Green)이 편집했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딴 그린북이라고 불린다. 1936년부터 1966까지 해마다 증보되었던 이 책은 뉴욕을 중심으로 편집되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범위를 넓혀서 나중에는 북미 전체로, 다시 캐나다, 멕시코, 캐러비안, 버뮤다 등 매우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편찬된다. 이 책의 목적은 흑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식당이나 숙소 등을 소개하는 책자를 만들어서 흑인들이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던 시기였으므로 나올 수 있는 책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강력한 사회적 편견을 읽어낼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손을 맞잡고 편견을 넘어서는 길

누구나 인간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형성되는 우리의 생각은 다양한 인간의 환경과 요인에 의해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간다. 인생이란 어쩌면 수시로 변하는 생각의 여정을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인 까닭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탓이리라. 나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살아간다. 모두가 같은 생각만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기계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각양각색의 생각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세계가 구성되지 않는다. 끝내 양보하지 않는 자신만의 생각이 사회 구성원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편견이라고 부른다. 편견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다 한들, 사회를 혹은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실천하는 일이다. ‘손을 잡는다’는 말은 참 따뜻하면서도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손을 잡는 사람 모두에게 서로 다른 생각을 넘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한쪽만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 어울려서 제3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것,

그 지점들이 쌓이고 쌓여 새로운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바로 손을 잡는 중요한 의의가 아니겠는가. 손을 잡는 순간은 우리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거대한 지층으로 가라앉아 있던 편견의 파편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평생토록 그 편견의 파편들을 털어내지 못하고 금생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도 우리 같은 중생들의 숙명이겠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해 털어내는 것 역시 중생들의 도리일 것이다. 마음 가득한 편견의 파편 일부가 사라진 공간에 서서히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담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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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의미

‘벗’을 뜻하는 한자 ‘友’(우)는 참 묘한 글자다. 이 글자의 어원은 손을 맞잡은 모양에서 온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은 신체적 거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 거리이기도 하다. 손을 맞잡는다는 일차적으로 신체적 거리를 없앤다는 뜻이지만 심리적 거리를 없애는 것에서 완성되는 행위다. 손을 잡고 있어도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면 그저 표면적인 행위에 불과하지만,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면 질수록 손을 잡은 두 사람의 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로 변화한다. 멀리 있어도 마음이 가까우면 진정한 벗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뜬금없이 벗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협력의 기본 조건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간관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협력 관계 덕분에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은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타자들에 의해 구성되고 존재한다는 의미다. 돌아보면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나 자신의 생각과 행위들이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이다.

착하다, 어리석다, 따뜻하다, 깔끔하게 일을 한다, 잘생겼다, 다혈질적 성격이다, 우직하다는 등의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내리는 것이다.그러한 평가를 통해서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이 구성된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내가 존재하므로,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혹은 사물)과 협력하는 것은 생존의 일차적 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니가 셜리를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다른 높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은 서로 손을 맞잡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높이는 그저 계단 하나보다 낮았지만 그들의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었으므로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협력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서로 다른 생각과 사회적 처지 때문에 이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생각이야 어떠했든 셜리는 토니를 채용했고, 두 사람의 긴 여행이 시작된다. 충분히 예상되는 것처럼, 이 영화의 대부분은 둘 사이의 갈등과 화해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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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둘 사이의 갈등이 영화의 전부였다면 <그린 북>은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지면서 ‘손을 맞잡는’ 순간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거대한 불평등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니 자신도 백인사회에서 변방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셜리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한 약자였다. 백인들이 환호해 마지않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가진 흑인이라니, 이렇게 아이러니한 일이 또 있을까. 그 부조리와 사회적 불평등에 눈을 뜬 토니가 셜리와 손을 맞잡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강력한 저항력이 생겼다.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예정되었던 연주회를 거부하는 장면은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에 대한 두 사람의 저항이었다.

협력을 위한 커다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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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셜리가 토니의 집을 방문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흐뭇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두 사람이 웃으며 포옹을 하고 손을 맞잡았다고 해서 그들의 사회적 처지나 개인적 신념과 생각이 동일해졌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한 것이지 동일해진 것은 아니다. 서로 손을 맞잡는 협력의 힘은 여기서 출발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의 편견을 없애는 출발점이며 나아가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출발점이다. 앞서 말한 우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단어이다. 우정은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 인간 대 인간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고, 상대와의 거리를 조율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로 우정이다. 그것은 당연히 편견과 불평등을 넘어서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다.

지역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문화원 역시 다를 바 없다. 한 지역의 문화원은 자신의 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연구하고 발현하는 행위는 반드시 다른 지역의 여러 문화원의 특성을 반영하면서 손을 맞잡을 때 비로소 작동된다. 지역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생각과 삶의 태도를 인정하고 손을 맞잡을 때 문화원의 역할과 성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문화원 역시 다른 문화원의 활동과 특성을 인정하고 협업할 때 비로소 지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협력은 상호 유사한 분야에서보다 서로 다른 분야와 생각의 만남에서 더욱 큰 효과를 낸다. 비슷한 분야 혹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개를 곁고 나아가야 할 동지지만, 서로 다른 분야는 동지가 되기 위한 지난(至難)한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상이한 길을 걸어오면서 삶과 세계를 구성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뜻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기는 어렵다. 최선을 다해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결단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만 그러한 협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살피는 것이며, 자신과 다른 부분을 과감하게 인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것이며, 이제까지는 없었던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싸운 끝에 얻게 되는 소중한 발걸음이다. 이러한 작은 발걸음이 모여서 새로운 역사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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