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에서 문화예술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있다. 각종 위원회가 소집될 때다. 특히 문화 부문의 위원회가 소집되면 늘 만나는 얼굴들이 있다. 그리고 늘 따라다니는 말들이 있다. 그 얼굴이 그 얼굴, 그 소리가 그 소리…. 회의에서는 새로울 게 없는 말들만 무성하다. 그러다가 첨예하게 선을 긋고 대립하는 지점이 있다. 이해가 걸린 문제가 건드려진 경우이다. 기를 쓰고 자기 주장만 쏟아내고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천에서 있었던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지난해 3월 경기연구원에서 문화예술 정책포럼을 이천에서 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경기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지역문화예술정책의 현안을 공유하고 함께 협의하는 네트워크 포럼을 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기회다 싶어 관내에 있는 주요 문화예술기관과 단체들에 연락을 취했지만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일이 많고 바쁜데 ‘지역문화정책 수립’과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목적으로 이들을 설득하기가 힘에 부쳤다.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의제가 없다면 주체적인 참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해 9월에는 이천시와 이천교육지원청이 이천혁신교육지구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추진단을 구성하고 회의를 소집했다. 50억 원 이상의 예산이 집중 투자되는 사업이라 각계각층의 기관, 단체 이해 관계자들이 모였다. 하지만 단시간에 중장기 추진계획을 세우고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보니 다른 지역의 혁신계획을 적당히 수정하는 수준에 머물러서 정작 필요한 사업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역이 가지고 있는 교육적 자원이 무엇인지, 지역의 역량을 어떻게 끌어오고 활용할 것인지, 마을과 학교를 어떻게 이어줄지 고민이 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선 예산부터 확보하고 보자는 식으로 혁신교육지구사업은 시작되었다. 무조건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사는 방식보다는 원하는 집을 짓고 사는 방식으로 전환하기는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가?
올해 2월에는 이천문화재단 설립 타당성 연구용역 착수보고회가 열렸다. ‘문화재단 설립’은 ‘지역문화정책 수립’보다는 문화예술 관련 기관, 단체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당장의 위기도 있지만, 재단 설립에 따른 수십 명의 인력충원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재단이 해야 할 사업으로는 이천의 주요 축제(산수유축제, 도자기축제, 별빛축제 등) 주관, 문화시설(박물관, 미술관, 아트홀 등)의 운영관리 같은 것들이 언급되었다. 재단 설립이 기정사실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문화정책의 수립’과 ‘문화인력양성’ 같은 사업영역이 빠져 있는 것이 우려되었다. 당장에 필요한 사업으로 보자면 축제 운영과 문화시설 운영이겠지만, 길게 보면 나머지 두 가지야말로 재단이 해야 할 핵심적인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예술인의 예술활동지원, 생활문화사업과 문화예술교육도 문화재단이 간과할 수 없는 사업영역이다. 이런 사업영역에 대해서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해온 지점들이 있다. 일종의 경계선 지키기다. 각자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고 자기 영역에서 그저 자기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이는 전문가 중심, 행정가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던 문화예술계의 오랜 관행이기도 하다. 각자의 영역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 (출처: 이천시 공식 블로그)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경계가 무너지고 모호해졌으며 새로운 영역이 생기고 영역 간 융합과 협업이 시도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역 사회는 이런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여력이 없다. 협력의 경험도 거의 없다.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 행사의 경우를 보자. 이 행사는 문화원이 1998년 처음 시작하여 2006년 9회까지 주관하다가 이천시로 이관되었다. 그 후 이 행사는 사실상 예총 중심의 위원회가 조직되어 지난해 21회까지 이어져왔다. 지난 20년간에 걸친 이 행사를 되돌아볼 때 작가 중심의 프로그램과 200여 점의 많은 작품은 산출했지만, 정작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 다양한 미술교육과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참여 프로그램에는 소홀했다.
이런 이유로 이천문화원은 2016년부터 시민 도슨트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일어난 문제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지역 사회의 인식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예술영역에 왜 문화원이 들어오느냐?’, ‘사진은 사진전문가의 영역이니 우리 허락 없이 사진 강의를 개설할 수 없다.’ ‘개나 소나 예술 하나? 아무나 예술하는 게 아니다.’ ‘문화원은 전통문화나 제대로 해라!’ 이런 이해 수준 위에서 지역의 문화예술기관, 단체들이 협력을 할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어 보인다. 문화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도 아직 지역의 시간대는 캄캄한 밤이다.
이천문화원 조각도슨트 활동 (출처: 이천문화원)
요즘 영화 [어벤저스]가 광풍처럼 대한민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 같은 영화를 보면 힘을 통제하지 못해 그 힘의 노예가 된 악당 빌런들을 만나게 된다. 빌런들은 한결같이 힘에 의한 해결, 압도적인 힘의 성취에 빠진 자들이다. 그래서 더딘 과정이나 지루한 협상을 참아내지 못한다. 이에 비해 영웅들은 어떤가? 영웅은 힘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을 벌인다. 힘이 가진 지배의 욕망에서 벗어나 스스로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어벤저스]는 우주 최고의 빌런 타노스를 상대하기 위해 영웅들이 힘을 합쳐서 결성한 팀이다. 새로운 힘의 모델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협력’이다. 협력이란 무엇인가? 협(協)에는 힘력(力)자가 3개나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이 얼마만큼 세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을 어떻게 모으고 합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협(協) 자가 들어간 단어들이 몇 개 있다. 협동(協同), 협조(協調), 협력(協力). 영어로는 코오퍼레이션(cooperation; 협동), 코오디네이션(coordination; 협조), 콜레버레이션(collaboration; 협력)으로 표현한다. 코-(com-, co-)는 ‘서로 함께’라는 뜻의 접두어로 우리말 ‘협(協)’에 해당한다. 비슷비슷한 말들 같지만 이 3개의 단어들은 우리나라 근현대 시기에서 나름대로의 이유와 필요 때문에 등장한 개념들이다.
‘협동’(cooperation)은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새마을운동의 3대 기본정신(勤勉, 自助, 協同)의 하나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여기서 협동은 ‘협동조합’을 뜻하는 코오퍼레이티브(co-operative)와 그 의미가 일치한다. 힘을 합친다는 뜻이니 나쁠 것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협동이라는 말에서 왠지 ‘동원’의 느낌, 그저 맡겨진 일이나 충실히 하라는 이상한 공기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개인은 오직 힘을 모으는 개체단위로만 작동할 뿐 개미사회 유형의 일사불란함으로 목표를 위해 헌신하고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이 협동은 일종의 피라밋 건설에 동원된 협동이다. 근대적 시민, 자각에 눈뜬 개인은 필요치 않다. 전후 복구와 빈곤의 극복, 경제개발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국민동원형 협동의 가치만을 강조해온 흔적을 우리는 발견한다.
‘협조’(coordination)는 조정(調整), 조절(調節) 등으로도 번역이 되는데 힘을 합해 다시 질서를 회복시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수천 마리의 개미가 모여 사는 개미집이 있다. 이 개미집을 코끼리가 밟고 지나가면 어떻게 될까? 개미들은 이 갑작스런 사태에 잠시 혼란스러워하겠지만 곧 무너진 집을 복구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인다. 1980∼90년대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기획조정실(企劃調整室; Planning & Coordination)이 이런 역할을 수행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성장 시대에 경험한 협동과 협조는 자율보다는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내몰려서 그렇게 했던 것이고, 그래서 다른 목소리를 낼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시당하고 통제받아온 건 아닐까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잔말 말고 어서 노를 젓기나 해!” - 딴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저 나는 노만 저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지치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메울 것이다. 하지만 배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면? 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합의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노 젓는 일은 무익한 일이다. 이렇게 노 젓기(Rowing)가 아니라 방향잡기(Steering)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방향잡기야말로 기획조정실이 해야 할 일이고 정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서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진전과 성장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사회적 이해의 조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와 맞닥뜨렸다. 이제는 타율적으로,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자율적 주체성을 지닌, 근대적 시민으로서 서로 간에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여기서 ‘협력’(collaborat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콜레버레이션은 공동작업(共同作業), 협업(協業)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떠올려보라. 단원들은 자신만의 악기를 연주하지만 전체의 화음(和音)이 서로 함께 어울리도록 협력하면서 더 큰 하나의 협화음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재능과 역할, 개성과 전문성을 가진 동등한 주체로서 공유된 비전과 목적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협업하는 것이다.
‘파트너십’(partnership)은 협력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다수의 행위자가 공동의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고 주체로서 참여하여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관계를 통해 창조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다. 민관협력 파트너십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과 관의 관계는 지퍼 모델로 설명하는 게 쉬울 것 같다. 지퍼록은 서로 다른 두 면을 위로 올릴수록 톱니바퀴처럼 단단히 연결시켜준다. 내리면 느슨하게 풀어줄 수도 있다.
‘거버넌스’(governance)도 협력의 한 방식이다. 파트너십이 양자간 협력이라면 거버넌스는 다자간 협력의 방식이다. 지역 사회의 이해당사자들이 지역의 문제를 함께 모여 ‘자치적으로’ 그리고 ‘협력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사회적 협의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거버넌스를 협치(協治)라고 부른다.
거버넌스는 정부 주도의 획일적인 통제와 관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방관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행위자로 협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해나가는 과정이다.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사회현실에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복잡한 문제나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제 우리는 지역 사회의 어떤 일에 대해서 어느 지점에서 어느 정도까지 손을 잡고 협력할 것인지 협력의 방식, 협력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면서 캡틴 아메리카가 외친다. “어벤저스, 어셈블!”(Avengers, Assemble!) 이 외침에 모든 어벤저스들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돌격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모두가 힘을 합해 연합전선을 펴는 것이다.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팀으로 작동하는 협력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어벤저스의 ‘어셈블’은 협력의 멋진 영화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의 어셈블리(Assembly, 국회)는 어떤가? 진흙탕 싸움으로 서로를 비난하며 상대를 탓하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 이해당사자들이 합의를 이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게 한다. 협력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협력의 경험이 쌓여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현재 우리가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는 멀리 보고 더딘 참여의 과정을 밟아나가며 인내로써 상대방을 기다려주는 포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