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은 어렵다. 협력은 좋은 것이라고 권장되고 재촉되지만, 협력하는 일은 몹시 괴롭다. 협력은 왜 어려운가. 사람 마음이 모두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력을 촉진하는 규칙 혹은 의례를 정하고 제대로 잘 지켜가는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의한 이른바 ‘공유의 비극’ 현상은 어찌할 수 없다. 정부/지방정부 기관과의 협치는 말할 것도 없고, 지역의 문화원과 예술가 또는 지역 주민들과의 협력 또한 갈수록 ‘지속적인’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중도에 좌초되고 마는 최근의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국 이스트런던대 정치경제학과 교수이자 2001년부터 웹 저널 《공통인(The Commoner)》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는 맛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역사의 시작』에서 “협치의 주요 문제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의 조정과 절합이지, 그 과정 자체의 외부에 있는 목표의 성취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협치/협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참조점이 된다. 위 주장처럼 협치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들을 조정하고 절합하기 위해 ‘규칙의 정의’를 내리는 일이다.
정부/지방정부의 정책에 참여하는 비정부 행위자의 역할은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규범을 따르는 것인데 반해, 협치의 경우 그 역할은 규칙을 정의하는 일에 참여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규칙에 관한 게임’인지, ‘규칙 아래에 있는 게임’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위 주장에 따르면 “정책은 구체적인 사건인 반면, 협치는 연속적인 과정이다”라고 말한 데 안젤리스 교수의 언급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렇다. 지역에서 문화원이 외부의 예술가(단체) 및 지역 주민들과의 원활한 협력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규칙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협력을 위한 ‘평상(平床)’을 하나 놓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의 원리는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고,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낮지 않다는 점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1/n의 정치학이 구현되는 장(場, feild)이다. 협치/협력에 관한 이러한 정의는 공유지의 비극이 심화되고 있고,
이른바 소유자사회(ownnership society)를 넘어 지역의 회복력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특히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해 공유(共有)의 가치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공유인(commoner) 되기의 상상력과 실천이야말로 소유자사회를 넘어 지역의 회복력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로컬(local)’과 ‘커뮤니티’야말로 우리 사회의 유일한 희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옥천 어머니학교
이 점에서 지역의 문화원은 지역의 예술가(단체) 및 지역 주민들과의 다양한 협력의 모델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는 지역(사회)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환원주의자의 과학도 아니고, 결정주의자의 경제학도 아니다. 공유인 되기의 상상력과 실천이 요구된다. 그런 공유인들은 ‘영원한 성장’이라는 우리 시대의 주술을 넘어 ‘탈성장 시대’의 문화적 문법을 새로이 대비하면서 지역 공동체와 상호부조의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회복의 경제학과 행복의 경제학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공유인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중세 봉건 시대 영국에서 서민과 평민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공유인이라는 말을 주체적이고 높은 지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으로 전유하고자 한 논자는 공유경제학자 데이비드 볼리어이다. 데이비드 볼리어는 『공유인으로 사고하라』(원제 Think like a Commoner)에서 잊혀진 공유재(commons)의 역사를 추적하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협력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입증한다. 공유인에 대한 데이비드 볼리어의 이와 같은 정의는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인간관과는 전혀 다르다.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될 수 없다’고 한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주장이 근대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상품화’ 경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온 자본주의의 역사를 생각해보라.
그 결과 우리는 어느 논자가 “시장경제를 가진 사회에서 시장사회(market society)를 이룬 시대”(마이클 샌델)에 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장사회’는 시장과 시장가치가 원래 거기에 속하지 않았던 삶의 영역으로 팽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돈이 된다면 시장화의 길을 걷게 된 셈이다. 결국, 내가 사는 지역에서 공유인 되기를 실천하려는 협력의 과정이 요청된다. 현대판 인클로저는 중세 시대의 돌담과 울타리 대신, 국제통상조약, 재산법, 느슨한 규제, 기업의 자산 매입을 통해 지금도 계속 달성되고 있다. 물질적/비물질적 대상으로서 공유재를 보존하고 함께 공유할 수 있을 때 지역의 회복력이 높아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은 ‘협력의 의례’ 내지는 ‘의례적 연대’에 있다고 주장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주장은 지역의 문화원을 비롯한 문화예술판에서 구축하려는 네트워크 형성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리처드 세넷은 진정한 협력의 모델은 일종의 ‘공동작업장 모델’에 있다고 말한다. 각 지역에 있는 문화원들이 일종의 오픈 플랫폼이 되어 하나의 작업장 모델처럼 협력의 의례 내지는 의례적 협력을 형성하고 강화한다면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옥천 청소년 언론학교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공유의 문제를 다루는 영향력 있는 세 모델, 다시 말해 공유재의 비극, 죄수의 딜레마 게임, 집합행동의 논리 같은 세 모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는 지역에서 풀어야 할 문제는 많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 주도 사유화 아니면 ‘국가’ 주도 중앙집권화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더 많아져야 하고, 저마다의 사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시장과 국가가 주도하는 ‘체계’의 힘은 언제나 항상 로컬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힘보다 압도적으로 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충북 옥천군에서 ‘커뮤니티 저널리즘’을 지향하며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옥천신문>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탄탄한 공론장을 형성하며 군청이라는 체계의 힘에 저항하며 자치의 힘을 기르고 있는 옥천의 경험은 그래서 소중하다. <옥천신문> 황민호 제작실장은 필자와의 대담(2019.6.30.)에서 “체계의 제도를 어떻게 생활세계로 끌어내리고, 생활세계 안에서 제도를 움직이게 할 것인가가 큰 관건이 된다”고 말한다.
‘커뮤니티 저널리즘’을 지향하며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옥천신문>
실제 충북 옥천군 안남면은 주교종 선생이 주도하는 지역의 농민회를 중심으로 언론사와 지역 주민들이 마음을 모으고, 협력의 규칙을 스스로 정하고 지키며, 면(面) 단위에 배바우작은도서관을 짓고 스스로 운영하고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5년의 준비 끝에 100% 옥천에서 나고 가공한 지역 농산물 판매장인 옥천로컬푸드직매장을 오픈(2019.5.30.)함으로써 지역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황 실장은 “처음 안남면에서 촉발된 이러한 흐름들이 이웃한 안내면으로, 그리고 지역의 중심지인 옥천읍으로 점점 번지고 스며들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대전에서 활동해온 문화활동가들이 옥천역 앞에 문화공간 ‘둠벙’을 조성해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하며, 인구 5만 명 규모의 군(郡) 지역에서 월간지 『옥이네』를 발행하는 등 지역의 사람들과 밀착된 활동들을 적극 수행하고 있다. 쉽게 말해 행정에 의해 박제된 공공성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공동체적 감수성을 되살리며 ‘관계’에 의한 공공성을 강화하며 문화자치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더 축적되고 강화된다면 행정 관청은 예산만 지원해주고, 실제 일은 마을 주민들이 서로 마음을 모아 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며 지역의 주민들이 주체가 되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100% 옥천에서 나고 가공한 지역 농산물 판매장인 옥천로컬푸드직매장
갈등은 언제나 항상 상존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적인 히말라야 라다크 사회에서 사람들이 갈등을 피해갈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이른바 ‘자발적 중재자’라는 규칙을 정해 운영하는 점을 참조할 수 있다. 양자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의견 차이가 생기면 제3자가 거기서 조정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읽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에서 “갈등보다는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제3자의 중재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퍽 감동한 것은
갈수록‘나만 아니면 돼’라며 각자도생의 생존 매뉴얼이 숭배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일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결국, 공유지의 훼손을 막기 위한 공유인 되기의 문화적 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협력을 위한 규칙이 일종의 관습법으로 작동하는 히말라야 라다크 전통사회는 협력을 위한 평상을 놓았다고 간주할 수 있으리라.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 사는 지역에 협치/협력을 위한 ‘평상’ 하나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