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의 개발(開發)이냐 보존(保存)이냐, 온고지신주의(溫故知新注意)
류 정 엽 국립성공대학교(國立成功大學) 국제경영관리소(IMBA)
· 한국에서 알려진 단어는 한국어 표기를 우선으로 하였다.
· 지명은 중국어 발음 그대로 표기를 원칙으로 하되, 괄호에 한자를 넣어 그 뜻을 명확하게 하고자 하였다.
지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한국인이 쓰는 한자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 연도 표기는 대만 자료를 최우선으로 하였으며, 이는 한국 자료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대만화폐표기는 NTD로 하였으며, 한화로 표기시 한화에서 대만달러(NTD)로 환전하는 평균기준으로 약 1:40
(1NTD=40원)을 기준으로 하였다.
Ⅰ. 배경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보면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라는 말이 있다. 이 공자의 가르침을 잘 지키고 따르는 나라가 있다. 바로 대만이다. 대만은 다민족(多民族), 다문화(多文化)국가로 지정학적 위치상 동남아시아의 경제, 문화 등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수세기 전부터 해왔다. 중국과 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이민자를 제외한 원주민 인종 수만 아홉 개 부족을 넘는다.
지난 5세기 동안 대만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국 명대 정성공(鄭成功, Koxinga)의 지배를 받았고, 청(清)을 거쳐 일본과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대만학자들은 대만(臺灣)과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엄연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영문표기상 Taiwan과 Republic of China (R.O.C)는 완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9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와 더불어 2006년에 터진 미국 금융위기로 대만은 심각한 경제위기와 실업을 맞이하였다. 그 후 중국과의 경제협력으로 회복세를 보이며 2010년 국내총생산량(GDP)이 10.8% 증가하였고, 명목 국내총생산량이 미화 2만 달러를 넘었으며 실질 소비능력(PPP) 국내총생산은 2010년 미화 3만 5천 달러로 한국을 앞질렀다(출처: International Monetary Fund – 2011 World Economic Outlook). 실업률 1145%를 기록하던 1948년과 비교해볼 때 어마어마한 발전을 하였다.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대만을 이끌고 있다. 2011년 대만은 국민당 창당100주년을 맞이하였으며, 대부분 국민들은 현 정부의 100주년을 축하하면서도 제대로 된 역사와 가치정립을 요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Ⅱ. 대만과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 사람에게 있어서 대만은 가깝지만 먼 나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은 대만을 중국의 한 부분으로 중국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발음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대만을 태국과 같은 나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역사 속에서 대만과 한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1912년 중국국민당을 창당한 쑨원(孫文, 또는 中山)은 삼민주의(민권, 민족, 민생)를 이념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일조하였다. 1946년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장개석(蔣介石)은 중국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이주한 후 김구선생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으며, 윤봉길의사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정치자금(미화 약 20만달러)을 지원하였고, 김구선생의 한국독립당과 장개석의 국민당은 화교무역 등을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만은 국제적 정세와 이승만정부의 중국내의 공산군 숙청 요청을 이유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한 미국 33대 대통령 트루만(Truman)의 결정 하에 미군을 대만에서 주둔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화 100만 달러를 1951년부터 1955년까지 경제 원조를 받았다. 1992년 8월 24일 한중(韓中)수교를 계기로 대만은 8월 22일 한국과 국교단절을 선언하였고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인의 소유였던 대만대사관 부지를 국교법에 따라 중국에 이양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만 내에서는 반한(反韓) 감정이 자연스레 고조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와의 교류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약 2007년부터 시작된 대만의 한류열풍을 계기로 대만에서는 점차 반한 감정이 사그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한국음식, 한국어 공부, 한국여행이 하나의 취미이자 트렌드로 자리 잡히기 시작하면서, 국가의 인식이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곧 문화 컨텐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현재는 거의 반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일부 보수적인 대만사람이 현재까지도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피하고 있다.
현재 대만은 한국의 10대 교역국 중의 하나이며, 휴대폰에서는 HTC, LCD에서는 치메이(CHIMEI), 반도체에서는 TSMC가 한국을 바싹 추격하고 있다.
Ⅲ. 왜 타이난을 알아야 하는가?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때 타이난시(臺南市)를 빼놓을 수 없다. 타이난시는 대만에서 타이페이(臺北), 까오숑(高雄), 타이쫑(臺中) 다음으로 크고 가장 오래된 도시로 부청(府城)이라고도 불린다. 타이난시가 대만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서울을 기준으로 그 크기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타이난시는 재정상의 문제로 얼마 전 타이난현(縣)과 통합하였으며 타이난현에 있던 도시들을 전부 구(區)로 통합하는 행정개혁을 감행하였다.
타이난 사람의 주요 교통수단은 스쿠터이며 버스는 관광지를 제외하고 주거지 쪽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택시는 모든 편의점에서 부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며 추가요금은 없다. 타이난 사람들은 자가용보다는 주로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그만큼 사고도 잦다.
대만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을 소개할 때 본인이 어디에서 온 사람(예를 들어 타이난사람)이라고 밝힌다. 이는 곧 본인의 출신지를 밝힘으로 본인이 어떠한 성향을 지녔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흔히 대만에서 타이난 사람이라고 하면 중국어로 “慢慢來的人”(천천히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는 다시 말해 아무리 바빠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흔히 인식되며 상대방에 대해 배려와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 예로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도로에서 클랙션 소리를 듣기 힘들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늦게 가도 다들 기다린다.
타이난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중국어(中文)와 대만사람들 토속어인 대만어(台語)를 사용한다. 대만어는 중국방언으로 민남어(閩南語)라고도 불리며 시노티베트(Sino-Tibetan)어족에 속한다. 그러나 타이난 출신 사람들은 중국어에 있는 권설음(捲舌音)인 [zh], [ch], [sh]의 발음을 정확히 못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타이난 시의 특징은 다른 도시에 비해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다. 대만 사람들 사이에서 ‘젊을 때는 타이페이에서 열심히 일하고 노후 설계는 타이난에서 하라’는 농담이 있다.
타이난의 음식은 대만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문화, 역사 유적지를 구경하며 유명한 음식점에 들려 휴식을 취한다.
대만에는 문화유산보존법이 있다. 이 법은 1982년에 제정되어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개정되고 있다. 이 법은 대만 문화유산을 보존, 관리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 법은 가장 오래된 역사의 도시 타이난을 기준으로 제정되었다. 다른 도시들은 법과 도시계획에 문화재, 유적 보존을 넣고 있는 반면에 타이난시 정부는 문화재보존법을 중심으로 비영리단체 문화관련 법인들과 보존사업을 같이 하고 있으며 도시계획에 따로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타이난시는 문화고적들을 보존 관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문화유적들은 법에 따라1급, 2급, 3급, 국가지정유적, 지방정부유적, 도시유적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 법에 의해 1급유적 7개, 2급유적 8개, 3급유적 38개, 국가유적 2개 도시유적50개가 있다. 2003년 자료에 의하면 대만 전체 1급유적 24개, 2급 유적 50개, 3급 유적 222개, 16개 국가유적, 74개 지방정부 유적, 169개 도시유적이 있음을 감안할 때 타이난시는 그야말로 문화유산의 도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Ⅳ. 타이난의 고적
타이난시는 5년 전, 문화원구(文化園區)라는 이름하에 8개 구역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또한 시내 도로교통이 불편한 점을 감안하여 고적지를 중심으로 자전거 또는 도보로 둘러볼 수 있게 관리하고 있다.
<타이난시 8대 문화원구 설계안>
<타이난시 6대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자전거 전용도로 설계도>
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타이난은 시(市) 전체가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난 역에서 동쪽으로 가면 동안방문화원구(東安坊文化園區), 서쪽으로 가면 기타 문화원구가 있다. 이들 모두 타이난 역을 중심으로 반경 5km 내에 밀집되어 있으며 20년 이상 된 맛집들이 곳곳에 있다. 타이난 시정부에서는 아래와 같은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문화관광 사업관련 비영리단체 역시 이런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타이난시는 시정부(市政府)자체가 직접 문화관광코스를 설계하여 선보이고 있는데, 단순히 특정지역을 어떻게 들려야하는가가 아닌 방문목적, 교통, 소요시간, 감상 포인트, 그리고 방문객의 스케줄에 맞춘 관광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타이난에 자유 여행 시 자동차, 스쿠터를 기차역 주변에서 빌릴 수 있으며 자전거 역시 유적지 주변에서 대여할 수 있다. 시정부에서는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안내서비스를 24시간 운영하고 있으며 거주 외국인을 위한 타이난시 관련 잡지 등을 온라인 및 오프라인으로 배포하고 있다.
1. 타이난 기차역
타이난 기차역은 타이난시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33년인 1900년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타이난에 기차역이 들어섰다.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지어졌으나 1936년(쇼와11년) 현재의 모습을 갖춘 2층으로 된 타이난 기차역을 재건축하였다. 이 건물은 일본 근대식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기차역은 당시 타이난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로 알려졌으며, 특히 기차역 2층에는 9개의 방이 있는 여관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이 여관이 사유로 바뀌면서 식당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사무실로 바뀌었고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 가장 눈여겨 볼 점은 1936년 모습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국립성공대학교(國立成功大學校)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대학교이다. 성공(成功)은 네덜란드를 내쫓고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우고 대만 역사를 새로 쓴 정성공(鄭成功)의 이름을 따서 1931년 타이난고등공업학교(臺南高等工業學校) 개교하였다. 11개 캠퍼스, 9개 단과대, 40개 학부, 82개 대학원, 54개 연구소가 있다. 2011년 대학종합평가에 의하면, 국립대만대학교(國立臺灣大學校) 에 이어 대학종합평가 2위를 차지하였으며 대만 상위 3,000대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교 1위로 뽑혔다.
이 곳 캠퍼스 중에서 기차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광복캠퍼스(光復校區)는 일제 메이지 시대 때 일본군 보병 2사단 주둔지였다. 현재 이 건물들은 아주 잘 보존되어 있으며, 각 건물에 역사학과, 인더스트리얼 디자인학과, 예술연구소 등 3개학과가 있다. 학교 자체 역사는 100년이 채 되지 않았으나 100년 넘은 건물을 현재 강의실로 쓰고 있다.
3. 적감루(赤崁樓)
적감루는 1624년 네덜란드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일종의 초소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건물 꼭대기에서 중국대륙의 명(明)나라 침입을 감시하였으며 근처 지역 안평(安平)에 있는 초소와 통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명나라가 청(清)나라에 패배할 무렵인 1661년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를 대만에서 내쫓고 동녕왕국(東寧王國)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이 건물은 동녕왕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은 현재 건물 뒤편에 네덜란드의 흔적이 있으며, 시대별로 용도에 맞춰 조금씩 변화하였다. 명나라, 청나라, 일본, 그리고 현재까지의 흔적을 조금씩 찾아볼 수 있다. 적감루는 총 2동(棟)이 있으며 유적을 감상할 수 있고 2층에 올라가면 타이난 시를 볼 수 있다. 또한 매주 주말 저녁이면 시민을 위한 무료 음악회를 열고 있다.
4. 국립대만문학박물관(國立臺灣文學館)
대만문학박물관은 건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만문학박물관 건물은 1916년 일본에 의해 지어졌으며 1949년까지 일본 타이난시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중화민국 타이난시정부 건물로 사용하다가 2003년 국립문학박물관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대만문학과 언어의 역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으며, 문학관련 도서관을 지하에 따로 두고 있으며, 1층에는 책을 볼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5. 안평고보(安平古堡)
대만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보(城堡)이다. 적감루(赤崁樓)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후 정성공 및 3대의 집으로 사용되면서 모양이 조금씩 변하였고 통치가 변함에 따라 그 모양도 조금씩 변하였다. 네덜란드가 지은 최초의 성보로 적감루와 함께 통신을 하며 일종의 침략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청나라에 지배를 받으면서 이곳은 군사령부로 바뀌었다.
현재 이곳은 타이난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히며, 시장, 각종 먹거리를 비롯하여 오래된 건물이 많다. 이 건물들은 예전에 여러 나라에서 온 회사에서 세운 것으로 현재는 박물관, 식당, 찻집 등으로 대부분 민간화되어 사용하고 있다.
Ⅴ. 타이난의 문화사업
타이난시는 개발(開發)과 보존(保存)의 그 중간인 공존(共存)을 택했다. 타이난은 가장 오래된 도시, 변할 수 없는 도시, 가장 보수적인 대만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 중국어와 대만어가 공존하는 도시,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많은 도시, 교통 불편한 도시로 무엇인가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는 냄새가 난다. 하지만 이 곳 2010년에 당선된 타이난시 시장 라이칭더(賴清德)는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며, 문화유물 보존 사업뿐만 아니라 최근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 최근 3년간 녹색사업을 펼친 결과 도시 내의 공기 중 중금속 함량이 월등히 줄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으며, 국제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위해 2012년 국제예술제를 개최하여 세계 문화예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만의 세계를 선보였다.
시간이 흐르면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된다. 과거에 집착만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변화가 필요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를 무시할 수 없다. 이곳에서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보존 가능한 곳은 전부 보존을 하고 있다. 재정상 유지가 힘든 부분은 이미 민간단체 혹은 사업자로 넘어가 그들만의 사업을 하며 그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변화 역시 이들은 자연스러운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 유물이 특정시대를 반영한다고 해서 그 부분만을 보존하려 하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네덜란드 시대에 있었던 건물이 명나라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용도와 구조가 변했고 정성공의 동녕왕국이 지배하면서 그 용도와 구조가 변했다. 또한 일본이 지배하면서 마찬가지였다. 타이난은 그 자체를 보존하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낼 수 있다."
위의 그림처럼 풍부한 문화자원, 리더십과 시민의식이 포함된 인적자원, 그리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 3요소가 적절하게 유지될 때 도시의 지속적인 지역발전이 가능하다. 물론 타이난시가 여러 가지 방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대만 여러 도시 중에서 참으로 진귀한 도시 중에 하나로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고 사려 된다.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는 그의 저서 ‘The Creative City: A toolkit for Urban Innovators’에서 창조적 도시를 구현하는 공식을 제안했다.
창의적 도시 = 도시 발전 × 문화적 정책 + 창의성
이 공식은 결코 문화적 자산 하나만으로는 창의적인 도시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문화적 자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도시발전이 있어야 하겠고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다른 도시와 차별할 수 있는 창의성이 부가될 때 경쟁력 있는 도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타이난시의 경우 각종 자원과 정책이 도시의 발전과 특색을 결정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로서 세계에 도약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