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별보기

<특집> <조직/경영>
자치분권 시대 문화원이 나아갈 길지방문화원인가, 지역문화원인가
염 신 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 겸임교수


양방향 화살표 사진

‘지방’과 ‘지역’은 늘 애매하게 혼동되며 사용되는 용어다. 영어권 단어로는 대략 ‘로컬(local)’로 표기되는 이 개념어는 사전적으로 따져보면 각각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지방의 경우는 “어느 방면의 땅”이라는 한자어의 의미를 그대로 옮긴 뜻과 “서울 이외의 지역”이란 의미를 지닌다. 지역은 “일정하게 구획된 어느 범위의 토지”라는 의미와 “전체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나눈 일정한 공간 영역”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두 단어 모두 공간적 구분을 위해 사용되는 명사이다. 차이가 있다면 ‘지방’의 ‘방(方)’이 방향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지역’의 ‘역(域)’은 경계라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여기서 2차적인 의미의 차이가 파생된다. 지방은 중심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변두리라는 의미가 파생되는 것에 비해, 지역은 중심과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서로 다른 권역의 경계를 의미할 뿐이다.

오랫동안 도읍(都邑)인 한양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왕조국가를 형성했던 조선의 경우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이 존재하는 도읍지와, 상대적으로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이 거주하는 지방 사이에 상호간의 경계와 갈등이 지속되는 역사적 경험을 축적해 왔다. 말하자면 지방이란 용어는 공간적 개념의 단어이기도 하지만, 권력적 함의를 담고 있어왔다. 이런 점에서 지역이란 단어가 보다 서구적 개념의 로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지방은 로컬의 개념과는 일치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는 근대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고 맞이한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체제에서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지속했기 때문에 서울과 그 주변인 경기, 인천 지역을 포함하는 수도권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지방을 인식해온 역사가 엄존하고 있다.

중앙집중적 구조에서 자치분권의 시대로

압축적 근대화, 산업화를 통해 국가의 근간이 확립되고 한국이 지역의 문제에 대해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빨라도 1980년대 이후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각 지역에 대한 발전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이런 계획들은 대부분 수도 서울을 정점에 둔 수직적 위계구조에서 지방의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방은 각각의 주체화된 지역으로 인식되기보다는 중앙 혹은 대한민국이란 큰 틀의 권력구조에 종속된 하위범주로 취급되어왔다. 특히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오랜 군사정권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후발 국가들의 군부 통치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군부 권력은 기본적으로 군 조직을 중심으로 소수 엘리트가 다수의 국민들을 억압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는 데 이런 상황에서 통치권력을 지역으로 나눈다는 것은 자신들의 통치 방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통치 시스템을 통해 국가 전역의 자원들을 자신들이 계획하는 방식으로 거침없이 활용할 수 있었다. 지역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분권적 상황에서는 이런 국가 주도의 전면적 개발 방식은 절대로 불가한 것이다. 개별 지역에 대한 고려 없이 중앙정부 중심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봤고 실제 고도성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중앙집중적 구조의 압축성장이 국민 개개인의 개별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뒤이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성장이 정작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이나 개별적 국민들의 삶에 그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했거나 차등적 삶의 조건을 주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1990년대 초반부터 우리 사회는 다시 정치적 지방자치제도와 함께 지역분권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게 되었다.이런 측면은 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문화정책은 주로 국가의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국가 중심의, 중앙정부 주도의 문화정책으로 일원화되어 있었다.

이런 흐름은 1980년대 초중반까지 지속되었는데 정부는 민족문화중흥이라는 이념 하에 한국문화라는 단일성의 가치를 중심으로 문화를 사고하며 정책을 입안하고 관리해왔다. 하지만 문화의 개념은 그 자체가 단일성으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런 국가주도 문화정책은 근본적인 모순점을 내재해왔다. 다소 개념적인 설명이지만 문화(文化)가 문명(文明)과 대비되는 지점은 상대적으로 우열이 아닌 차이의 지점에서 설명되어 왔다. 문명이 야만에 대한 비교우위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발전이나 성장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담고 있다면, 문화는 문명과 야만이란 이분법을 벗어나 실존하는 인간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다른 삶의 양식에 대한 인정 속에서 그 차이를 살피고 각각의 자연스러운 변화와 융합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족문화중흥이라는 오랜 국가 주도의 문화정책은 기실 문명론적 측면에서의 접근이라 볼 수 있으며, 문화의 개별성과 다양성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인식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국가 주도의 공급형 문화정책을 통해 중앙으로부터 국립 규모의 거대 문화시설이 만들어지고, 국립 예술단체들이 만들어지고, 이를 모사한 시설과 단체, 콘텐츠를 지방에 뿌리는 것이 국가 주도 문화정책 시대의 한 흐름이었다. 그 결과 각 지역이 갖고 있던 문화적 다양성이 자연스럽게 생태계를 형성하며 지역의 다양한 주체를 문화적으로 연결하고 자생적 저변을 만들어가는 것에는 한계가 뚜렷하게 된 것이다. 즉 지방문화라는 관점은 국가 주도 중앙문화에 대한 열등한 지위로서의 지역을 사고하게 만들며 중앙에서 생산되는 문화적 생산물을 지역에서 수혜적으로 향유하거나, 고작해야 지역은 중앙의 문화에 자산이 되는 리소스 이상으로 사고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방문화가 아닌 지역문화로 관점을 옮겨가게 된 것은 중앙의 하위범주로서 로컬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문화적 주체로 지역과 사람과 다양한 문화적 활동들을 재인식해야 한다는 필요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문화에 대한 재인식의 흐름은 2001년 ‘지역문화의 해’를 통해 문화정책적 목소리로 모여지기 시작했고, 우여곡절을 거쳐 2013년 말 ‘지역문화진흥법’ 제정으로 구체화되었다.

지방문화원에서 지역문화원으로

다소 시대적 풍파가 있긴 했지만 2016년 촛불정국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힘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볼 수 있듯이 문화를 도구적으로 사고하며 통치의 수단으로 악용하려던 흐름은 오히려 권력의 발목을 잡았고 문화는 본래 문화가 있던 자리, 자율성과 다양성이 인정되는 속에서 역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도 다시금 입증된 셈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다시 문화분권과 자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적 주체들도 한편으로는 이런 흐름에 부응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흐름에 힘을 받아 그야말로 살아 있는 지역문화의 역동성과 활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적기인 것이다. 한국의 문화원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이후 미국공보원 산하에서 활동하던 공보관들이 중심으로 지역의 문화활동을 이끌었던 가장 오래된 지역문화의 주체이다. 문화원이 지역에서 기여했던 문화적 활동의 노고는 결코 가볍게 다뤄질 수 없는 것이지만, 그간의 한계 역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측면이 있겠지만 문화원이 그 시작부터 관(官) 주도의 공보조직에서 연유했기 때문에 관 의존성이 원천적으로 높았으며, 지방문화라는 관점을 스스로 내재해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흔히 문화원에 대한 비판에서 자생적 기반의 부족을 거론하는 것은 특히 가슴 아픈 현실인데 문화원이 한국의 지역문화 기구 중 가장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으며 사실상 가장 오랫동안 비록 적은 규모이긴 하지만 지원을 받으며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현재 지역문화 지형 하에서 문화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이제는 지방문화가 아닌 지역문화라는 관점에서 문화원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특히 문화원이 갖고 있는 강점이 상대적으로 오랜 뿌리를 갖고 있으며 향토문화 진흥이라는 설립 목적에 따라 지역의 문화적 자산을 축적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왔다는 점인데 이런 향토문화를 어떻게 자원화할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 고민이 필요하다. 문화는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동하는 것이고 변화하고 융합된다는 점에서 그간에 축적해온 향토문화에 대해 옛것의 보존이라는 수동적이고 방어적 관점이 아니라 우리 지역에서 성장해온 문화적 자산이 다른 지역의 문화적 자산과 어떻게 같으면서 또 다른지,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변화해 갈 것인지에 대해 동태적으로 관찰하며, 그것을 어떻게 지역민들과 함께 공유할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는 다양한 지역의 문화주체와 소통하며 각각의 역할을 찾아 협력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지역 문화재단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활문화시설, 지역미디어센터 등과 어떻게 협업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화원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 곳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전국적으로 예정하고 있는 다양한 지역재생 사업에서 문화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이 예상된다. 해외의 다양한 지역재생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 현대 사회에서의 지역재생은 과거의 토목 중심 개발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지역의 문화적 자산과 전통의 맥락을 찾아내고, 그것을 지역의 실질적 이슈와 결합시켜야 ‘문화적 재생’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 사람과 자원, 조직을 연결시키는 합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문화원이 지방문화가 아닌 지역문화의 관점에서 그간의 정태적 향토문화에 대한 접근을 벗어나 변화하는 지역문화의 맥락을 찾고 그것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면 문화원 활동의 새로운 활력은 물론 지역문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선순환적 생태계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