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은 당신의 캔버스가 아니다.’ 수년 전부터 나는 이 말을 자주 뇌까리곤 한다.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갖은 형태의 문화예술(교육) 현장 및 활동들을 볼 때마다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지역을 ‘캔버스’로 여기는 경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역을 캔버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느 화가가 캔버스에 제 멋대로 붓질을 하면 마치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어떤 ‘그림(청사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처럼 지역에서의 문화예술 기획 및 활동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애초 문화기획자 및 예술(교육)가들이 원했던 그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의 지원사업 구조가 지역에 대한 그런 위계화된 시선을 내면화하도록 재촉한 측면이 분명 없지 않다. 문제는 지역의 회복력이란 하루아침에 복원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신이 사는 지역은 자기 회복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죽어버린 사회에서 어느 누가 지역의 회복력을 자신할 수 있을까. 작고한 철학자 M.푸코가 1975~1976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환원주의자의 과학도 아니고, 결정주의자의 경제학도 아니다. 로컬 지향의 상상력과 공유인 되기의 실천이 요구된다. 로컬 지향의 상상력과 공유인 되기의 실천이란 서로 얼굴을 대하고 사는 범위 내에서 평범한 삶을 누리며 작지만 의미 있는 공헌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비와 소유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구는 옅어졌고, 소비 형태는 물질에서 ‘일’이나 ‘관계’로 변한 최근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제대로 읽어내며 문화적 기획과 예술적 활동을 실천해야 한다.
일본 오사카시립대학 대학원 창조도시연구과 마쓰나가 게이코(松永桂子) 준교수가 돈보다는 시간을 선택한 일본 젊은이들의 최근 행태를 분석하며 ‘1인 다양성’을 주목하자고 제안한 것은
‘국가에서 지역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대의 문화예술 활동 측면에서 참조할 점이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지역의 가능성은 중앙정부의 정치나 지자체의 정책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교류의 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마쓰나가 게이코 준교수가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가 아닌, 그곳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의 문제”라고 말한 것도 그런 뜻일 것이다.
이에 따라 지역을 재발견하려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지역은 ‘지방(地方)’으로 폄하되었다. 이것은 지역 혹은 지방이 국가 혹은 중앙의 시각으로만 이해되었고, 국가 중심의 발전전략에서만 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이러한 시각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지역의 관점에서 지역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지역학’의 관점을 도입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특히 지역의 문화원의 경우 자기 지역을 이해하는 관점이 이른바 향토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고장과 향토에 대한 애착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향토주의는 자기 지역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이다. 향토주의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방이라는 말의 오염 실태를 보라.
‘부산학 전도사’를 자임하는 한국해양대 구모룡 교수는 「부산학, 현재와 미래를 잇는 대화」에서 지방이라는 말은 중앙/지방, 서울/지방이라는 이분법적 종속구조를 내포하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인 ‘지역’이라는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향토학이 아니라 방법으로서 지역학으로의 전회(轉回)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향토학을 지방주의라고 한다면, 지역학은 비판적 지방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지방주의는 자기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지역의 창의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실천하려 합니다.” 방법으로서의 지역학을 주장하는 구모룡 교수의 언급은 서울이라는 일극(一極) 집중에서 벗어나고,
지역의 내재적인 발전을 꾀하자는 지역분권과 문화자치가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절에 깊이 유념해야 할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가 어느 시에서 “만사에 대해 그 고장의 신령에게 물어보라(Consult the genius of the place in all)”라고 한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고 감히 확언할 수 있다.
여기 등장하는 ‘신령’이라는 말은 주술성의 의미를 강조한 맥락에서가 아니라 지역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며 지역의 역량을 스스로 강화하고자 한 언명으로 보아야 옳을 터이다.
지역 주민들이 참여함으로써 주민 주도성을 강조하는 자발적 ‘문화자치’ 공동체의 형성과 강화가 새로운 문화정책의 화두라고 할 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지방문화원의 경우 지역을 과연 누구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
국가 혹은 중앙의 시각으로만 지역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지역에는 문화 인프라가 절대 부족하고, 인적 자원 또한 절대적으로 결여된 ‘결핍의 공간’으로 바라보며 유구한 향토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혹은, 시장(市長) 내지는 시장(市場)의 시선을 철저히 내면화하며 ‘그들만의 리그’에서 각축하며 새롭게 도래한 도시의 세기(世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지역의 특이성(singularity)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찰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사는 지역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근본적인 시선 전환이 요청된다. 이때 필요한 관점과 태도는 예의 마쓰나가 게이코 준교수가 언명했듯이 생활인의 시각과 여행자의 눈높이가 서로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인의 시각과 여행자의 눈높이라는 말은 지역에서 구현하는 문화예술(교육) 기획 및 프로그램들이 소위 공급자의 시각에서도 벗어나야 하며, 중앙 및 서울에 대한 열등의식에서도 벗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나 안전한 마을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그런 안전한 마을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없이 중앙정부/지방정부에 의해 행정이 투입되고 재정이 집행되는 정책사업으로 절대 구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역에서 구현되는 사업을 진행할 때 “지역(마을)은 사람이다”라는 관점으로 전환해야 하고,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풀어나가야 한다.
“지역(마을)은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지역의 결정권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의사가 십분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발효(醱酵)될 수 있는 인내의 시간과 환대의 공간을 필요로 하며, 그런 관계의 발효는 결국 시간 속에 의미를 넣는 숙성의 과정에서 생성된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사물을 바라볼 때는 ‘낮은 이론가’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야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낮은 이론가는 누군가의 사연을 잘 헤아려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문화원은, 지역을 누구의 눈으로 보고 있으며, 지역에서 일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민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문화원의 활동이 단순히 기능주의자가 아니라 의미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지역의 문화원은 진정한 의미에서 ‘로컬 지향’으로의 전환과 변신을 위한 사유와 행동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나부터’ 고민하고, ‘더불어’ 고민을 공유하며 실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