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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향토음식’, 과연 존재하는가?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담당 교수

[경향신문] 1978년 1월 20일자 ‘여적(餘滴)’이란 칼럼에 이런 글이 실렸다. “교통망과 매스컴의 발달로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압축되고 생활양식에 혁명이 일어나고 인스턴트식품 인공조미료 등이 판을 치는 일면에서 집안의 장독대가 축소되고 있는 마당에 이 ‘고유음식 찾기’의 노력이 얼마만큼 알찬 결실을 맺게 될지가 문제인 것 같다.” 이 글은 마침 당시 교통부에서 ‘고유음식찾기위원회’를 문화재 전문위원·민속학자·요리 전문가들로 구성하여 향토의 고유음식 찾기에 나서게 했고, 지역 관광호텔에서는 지정된 ‘향토음식’을 식단에 의무적으로 오르게 하겠다는 정책을 제시한 데 대한 평론이었다. 그로부터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 이 평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향토음식, 본래 일본에서 생긴 용어


한식



사실 ‘향토음식’이란 용어는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민속학자 야노 케이이치(矢野敬一)는 일본의 ‘향토음식’이란 말은 본래 ‘명물요리(名物料理)’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1928년 잡지 『슈우노토모(主婦之友)』 1월호에서 ‘전국의 민중적 명물요리’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진 사실에 주목한다. 이 행사의 취지서에는 향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명물요리가 지방마다 한두 개씩은 있기 마련이라면서, 그 지방 출신의 민중들이 ‘맛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독자 투고를 통해서 집계하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것을 선정하여 ‘명물요리’로 선정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집계된 명물요리는 결코 일반 가정에서 조리하여 먹는 ‘가정요리’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근대가 제공한 관광과 연결되어 타자에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에서 개발된 것이 바로 명물요리였던 것이다. 1928년에 잡지 『슈우노토모(主婦之友)』에서 시도한 지방의 ‘명물요리’ 발굴은 이윽고 조선의 잡지에서도 등장했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에서 투표를 한 것이라 아니라, 서울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이 자신의 고장 음식을 하나씩 뽑은 결과였다. 바로 1929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에 실린 「진품(珍品)·명품(名品)·천하명식팔도명식물예찬(天下名食八道名食物禮讚)」이란 글들이다.

그 제목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시명물(四時名物) 평양냉면(平壤冷麵)」(김소저(金昭姐)), 「사랑의 떡 운치의 떡 연백(延白)의 인절미」(장수산인(長壽山人)), 「대구의 자랑 대구의 대구탕반(大邱湯飯)」(달성인(達城人)), 「천하진미(天下珍味) 개성(開城)의 편수」(진학포(秦學圃)), 「괄세 못할 경성(京城) 설넝탕」(우이생(牛耳生)), 「충청도(忠淸道) 명물(名物) 진천(鎭川) 메물묵」(박찬희(朴瓚熙)), 「진주명물(晉州名物) 비빔밥」(비봉산인(飛鳳山人)), 「전주명물(全州名物) 탁백이국」(다가정인(多佳亭人)), 「진품중(珍品中) 진품(珍品) 신선로(神仙爐)」(우보생(牛步生)) 여기에서 말하는 ‘명식물’의 ‘명(名)’은 유명하다는 뜻이고, 식물(食物)은 일본어 ‘타베모노(食べ物)’로 한국어로 음식이다. 곧 팔도에서 이름난 음식 9가지를 소개한 칼럼인 셈이다. 각각의 글을 집필한 필자의 이름은 필명(筆名)도 있고, 실명도 있다. 필명 중에는 지방의 지명이나 특징적인 음식과 관련된 것이 많다. 가령 신선로는 ‘우보생’, 설렁탕은 ‘우이생’으로 재료와 관련된 이름이다. 또 ‘다가정인’이나 ‘비봉산인’은 그 지방의 명소를 이름으로 붙인 필명이다. 앞에 나오는 경성·평양·개성·대구·진주·전주 등지는 1910년대 이후에 근대 도시적 모습을 갖춘 곳이다. 동시에 조선 시대에도 행정타운의 중심지 기능을 가지고 있던 읍치(邑治) 소재지였다. 결국 이들 지역에 근대적인 음식점업이 자리를 잡았고, 그것이 잡지 『별건곤』에서 팔도의 명식물로 예찬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식 『별건곤』 / 국립민속박물관



평양냉면은 당시에 이미 서울로 진출하여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본래 겨울에만 먹던 냉면이 당시 서울에 있었던 냉동시설 덕분에 여름에도 얼음을 구할 수 있었고, 여기에 아지노모토의 인공조미료가 더해져서 여름 서울냉면이 된 결과였다.

채소를 넣고 만든 만두인 편수(片水)는 이미 음식점에서 판매되어 인기를 누렸다. 인절미도 떡집에서 판매되는 음식이었다. 대구탕반은 대구 육개장을 가리키며, 설렁탕과 함께 가장 손쉽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점 메뉴였다. 당시 진주에서 비빔밥을 판매하던 음식점은 지금까지도 영업을 한다. 그 사정은 모주 한 잔에 콩나물국밥을 먹는 전주의 탁백이국도 마찬가지다. 진천의 메밀묵은 메밀묵밥을 가리킨다.

농어촌 주부 계몽에 목적을 두었던 1960~80년대 ‘향토음식’ 교육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한 대책으로 ‘향토음식’이란 개념이 다시 등장했다. 앞에서 소개했던 야노 케이이치에 의하면 1940년에 대정익찬회(大政翼賛會)란 조직이 발족되었고, 국민 전반을 대상으로 한 식(食)의 기준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식(國民食)이라고 한다. 동시에 각 지방 고유의 식량 사정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대정익찬회는 1941년에 ‘향토색이 짙은 국민식’ 개념을 만들어냈다. 특히 전시체제에서 절미(節米)·대용식(代用食)· 혼합식(混合食)이 강력하게 요구되면서 각 지방에 뿌리를 둔 먹을거리로서 ‘향토음식’이 재인식되었다. 곧 전시 상황에서 지방에서 음식을 소비하는 방식을 조사하고, 그것을 통해서 식량 위기의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의도로부터 ‘향토음식’이란 담론이 1940년대 초반 일본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극빈의 시대를 겪은 한국 사회는 적어도 1970년대 중반까지 ‘향토음식’을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경제개발의 혜택을 받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향토음식’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생겨났다. 특히 전두환 정부가 주도한 ‘국풍81’ 축제는 ‘향토음식’을 사회적 담론으로 끌어내고, 서울에서 지방의 이른바 ‘명물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각 시도에서 행정부서 주도로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선정되었고, 그것을 판매하는 전문적인 ‘먹자촌’이 축제의 현장인 서울 여의도에 개설되었던 것이다. ‘국풍81’에 관람자로 참여한 사람들은 아직 전국을 모두 다녀보지는 못했지만, 매스컴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향토음식’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었다.



탈

사실 ‘향토음식’에 대한 기초조사는 이미 1969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한국문화인류학회와 공동으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발간 사업을 수행했다. 전라남도에서부터 시작된 이 보고서 발간사업에는 ‘식생활’ 항목이 있었다. 그러나 조사 기간이 짧아서 충분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1984년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제15책으로 ‘향토음식편’이 발간되었고, 앞의 미진한 내용을 보완하게 되었다. 이들 보고서에는 적어도 산업화와 도시화 이전의 ‘향토음식’이 담겨 있다.

한편 1970년대부터 농촌진흥청에서 실시한 ‘향토음식’에 대한 자료 수집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료 수집의 목적이 농촌 주부의 계몽에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정부에서는 농어촌 여성을 대상으로 식생활을 개선할 목적으로 ‘향토음식’의 요리법을 표준화시키려고 했다. 1977년 9월 1일에 여성문제연구회에서 개관한 ‘한국여성의집’에서 시행한 교육 프로그램에도 향토음식이 포함되었다. 당시 정부의 지원을 받은 ‘향토음식’의 요리강좌는 다분히 농어촌을 중심으로 무지몽매한 여성을 계몽하여 진정한 ‘주부(主婦)’로 만드는 데 목적을 둔 식생활개선 운동이었다.

로컬푸드 시스템 구축이 바로 21세기형 ‘향토음식’이다

한국에서의 향토음식 담론은 1970년대 전국적인 생활양식의 통합과 산업화와 도시화의 경향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 관광의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향토음식은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더욱이 외식산업에서 지역성을 내세운 음식점이나 메뉴의 확산과 1990년대 이후 전국을 대상으로 한 관광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는 일정한 관련을 가진다. 그렇다면 지금 이미 일상적인 용어로 자리를 잡은 ‘향토음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국 어디를 가도 비슷한 음식점이 즐비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과연 ‘향토음식’이 존재할까? ‘향토음식’이란 말은 상업적 용어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포항의 향토음식으로 유명한 과메기의 주재료인 꽁치는 대부분 외국산이다. 강원도 평창의 황태는 러시아에서 수입한 동태로 만든다. 나주 영산포와 목포의 삭힌 홍어 중에는 국내산이 드물다. 이러니 무엇을 ‘향토음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나는 한국 사회에서 ‘향토음식’이 실종 중이라고 본다.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이루어지 시작했던 식재료 유통의 전국화가 ‘향토음식’ 실종의 첫 번째 단계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90년대에 이루어진 농수산물 개방과 관련이 있다. 21세기 초입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지역적 경계가 분명한 ‘향토음식’을 소비하기 어렵다. 더욱이 전국 어디에서도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있는 오늘날 한국인에게 ‘향토음식’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21세기형 ‘향토음식’에 대한 논의는 지역마다의 로컬푸드 시스템 구축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 사회에서의 ‘로컬푸드’는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유통되는 데 1~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여야 한다. 그래야 아침에 수확한 채소나 과일을 점심 식사 때 먹을 수 있다. 경기도도 몇 개의 로컬푸드 영역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 영역 내에서 가능한 농수축산물의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경기도에서 생산된 싱싱한 식재료가 경기도는 물론이고 서울의 음식점에도 공급된다면 그곳에서 만들어진 모든 음식은 ‘경기도의 향토음식’이다. 여기에 오래된 요리기술이 개입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향토음식’이 우리의 몸과 정신을 살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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