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시골 어느 집 처마 밑에 제비 한 쌍이 날아들었단다. 제비 부부는 의좋게 살면서 새끼를 여섯 마리나 쳐서 길렀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어미 제비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구나. 수컷 제비는 슬픔을 안고서도 혼자서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가 새끼를 길렀단다. 한데 혼자 자식을 기르기 힘들었던지 며칠 뒤 수컷 제비가 암컷 제비를 둥지로 데려왔지 뭐냐. 이후 두 마리 제비는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가 새끼에게 먹였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집 주인도 마음이 흐뭇했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사흘째 되는 날부터 새끼 제비들이 한 마리씩 마루에 떨어져 죽어나가더란다. 그게 이상해서 한번은 집 주인이 죽은 새끼들의 목을 살펴보았단다. 그랬더니 글쎄 목에 엄나무 가시가 잔뜩 들어 있었다지 뭐냐. 그렇게 여섯 마리가 죄다 죽은 후에야 제비 부부는 다시 새끼를 쳤단다. 집주인은 이번 새끼들이 또 어찌 되려나 싶어 제비 둥지를 살폈단다. 그랬는데 새로 태어난 새끼들은 한 마리도 죽지 않고 잘 자라더니 어미와 함께 훌쩍 강남으로 날아갔다는구나.”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일까. 그냥 “제 자식은 제 어미가 길러야 제대로 자란다”고 해도 될 일을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만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구체성을 띠면 띨수록 사람의 뇌리 속에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어떤 사실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각인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뇌리에 각인되면 사람들은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고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을 추동하는 것도 기실 이야기가 갖는 힘인 셈이다.
신선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 지역의 지리와 역사, 문화 등도 객관적 서술보다 ‘이야기화’하는 것이 훨씬 전달력이 강하고 오래간다. 하여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이를 십분 활용, 지역 소개와 함께 관광객 유치에 나서기도 한다. 부산시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부산시가 주축이 되고 언론사와 유관기관까지 의기투합, (사)스토리텔링협의회란 것을 만들었다. 그러더니 프로젝트 하나를 내게 의뢰해 왔다. 그게 바로 오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신선대’에 얽힌 역사를 소재로 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문제는 신선대에 얽힌 역사적 자료였다. “이상한 나라의 배 한 척이 표류하며 동해 용당포 앞바다에 닿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랬습니다. 그들에게 국호와 표류하여 닿게 된 연유를 한나라, 청나라, 왜국, 몽골의 언어로 물어보았으나 모두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붓을 주어 글을 써 보라고 하였더니 글자의 모습이 구름이 핀 산과 같았고 그림을 그려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이 올린 보고서다. 이때가 1797년 10월 14일(정조 21년)의 일로 조선인과 영국인의 첫 조우였던 셈. 하지만 이 짧은 내용만으로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일거에 해소해준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윌리엄 로버트 브로우턴이 쓴 항해일지다. 1804년 영국에서 발간한 항해일지를 발굴한 이는 고(故) 김재승 박사다. 그가 직접 번역까지 한 항해일지에 의하면, 이양선은 87t급 범선인 프로비던스호였고, 10월 14일부터 21일까지 8일간 신선대 일원 용당포(지금의 부산시 남구 용호동)에 정박했다는 것과 브로우턴 함장과 선원들은 북태평양 탐사 항해 중 식수와 나무 연료의 부족으로 정박지를 찾아 표류하다 부산까지 오게 된 사연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리고 브로우턴 함장은 자신의 일지에 “이른 아침 낯선 우리 배를 보기 위해 호기심에 찬 남자, 여자, 어린이들을 가득 태운 작은 배들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그들은 누볐거나 이중 천으로 된 흰 무명천의 헐렁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라며 조선 사람들을 처음 본 소감까지 적어놓고 있다. 만약 브로우턴의 항해일지를 발굴하지 못했다면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저기 둥둥 떠 있던」은 미흡하기 짝이 없는 팩션(Faction)으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이번 작업을 계기로 자료의 발굴과 조사가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고나 할까. 역사적 자료를 연구하는 일은 역사가의 일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는 역할은 문화 관련 종사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부산의 역사를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을 의뢰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 『굳세어라 국제시장』(2010) 발간 덕분이 아닌가 싶다. 『굳세어라 국제시장』은 국제시장을 일군 피란 1세대 상인 18명을 취재하여 묶은 일종의 민중구술사이다. 다만 다른 르포집과 차이가 난다면, 이런 구술 내용을 그대로 실은 것이 아니라 나름 독자들의 가슴에 와 닿도록 다양한 소설 형식을 차용하였다는 점이다. 아마 그런 덕분에 [부산일보]에 연재되는 내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굳세어라 국제시장』을 펴낸 후 알게 된 건, 아무도 이런 작업을 시도한 적이 없다는 거였다. 있어봤자 동사무소에서 편찬한 소책자 형식의 자필 수기가 전부였다. 향토사학자에 의해 국제시장 일대를 기점으로 한 파란만장한 역사는 제대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정작 이곳에 발 디디고 살아간 민중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채록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적이 놀랐다. 여태까지 문화 관련 단체에서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 문화양식으로 전승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니. 물론 처음부터 내가 이런 무모한(?) 작업을 했는지는 몰랐다. 발간 이후 각종 TV 방송사에서 방송 출연과 취재 문의가 쇄도하는 순간, 이게 얼마나 어렵고 귀한 작업인지를 알았다고나 할까. 하긴 나조차 취재하러 다닐 때, 취재원을 확보하지 못해 헛걸음을 몇 번이나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같은 작업은 결코 개인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중들의 개인사는 또 하나의 역사다. 그러므로 민중구술사는 그 지역의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자료다. 이런 향토사를 채집하고 기록하는 일은 누가 해야 할까. 문화단체 종사자들은 말한다. 이제 웬만한 역사와 지리, 자료들은 모았으므로 발굴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땅에 발 디디고 산 사람의 수만큼 많은 이야기가 아직 발굴, 조사되지 않았을 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조사할 게 없다고 한다면 그건 문화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신선대의 역사를 소재로 한 팩션 「저기 둥둥 떠 있던」이 한 달여 [국제신문]에 연재된 후, 부산시립박물관으로부터 의뢰가 들어왔다. 부산에서 출토된 역사적 유물을 소재로 이야기 작업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하여 내가 맡은 유물이 영도 동삼동 패총(貝塚)에서 발굴된 ‘사슴선각무늬토기’였다. 사슴의 모습을 단순한 선으로 새긴 이 토기 조각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연구관으로부터 듣는 순간,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조각 하나에 그런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 작은 조각 하나를 통해서 이곳에 살던 사람이 사슴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새겨진 선의 모양이 반구대 암각화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말에 적이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사슴뿔 문양의 왕관도 이곳 토기 조각과 연결될 수 있겠구나, 반구대의 암각화를 새긴 기법이 이곳 영도에도 영향을 미쳤다면 신석기 시대 사람들도 결코 고립되어 살아가지는 않았겠구나, 등등. 그러다보니 내 상상은 끝없이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버드나무’였다. 고래(古來)로 이별하는 그림에 버드나무가 많이 쓰이는 것은 버들 류((柳)가 머물 류(留)와 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반구대에 살고 있는 부족(部族)의 남자에게 시집 가는 누이를 떠나지 말고 여기 그대로 머물러 달라는 간절한 의미를 담고 있는 소도구로 활용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신석기인들이 주인공이므로 이들이 사용한 언어 또한 아직 미분화되었을 거라는 추정 하에 그 모어(母語)를 재구하여 활용했다. ‘그믐달’을 ‘검은달’로 표현한 것은 그런 고민의 흔적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당시 신석기인의 생활상을 어떻게 이야기 속에 리얼하게 담아내느냐였다. 그리하여 참고문헌들을 읽는 순간, 난 몇 번이나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신석기 시대라고 해서 결코 미개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으니까. 그들이 이용하는 재료와 도구가 오늘날과 같이 세련되지 못했을 뿐 나무와 돌 등을 생활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박물관 유물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얻은 게 하나 있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있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많은 자료가 있어도 가공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란 점을. 내가 쓴 사슴선각무늬토기 이야기는 단지 1차적 자료의 가공에 불과할 뿐이다. 이를 다시 뮤지컬, 영화, 연극, 마당극, 웹툰, 애니메이션, 무용 등으로 다시 재가공해야 그 문화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하여 문화원에서는 이런 이차적인 문화 창조 작업을 위한 프로젝트 수행에도 앞장설 필요가 있다.
『거기서 도란도란』(산지니 2018)
얼마 전에 ‘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썼던 부산 지역의 인물과 역사, 지리와 문화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거기서 도란도란』(2018)이란 책을 펴낸 다음이었다. 6년여 간의 작업의 결과물을 묶자 머리도 식힐 겸 훌쩍 떠났던 그 곳에서 아직도 활짝 피어 있는 르네상스의 꽃을 만났다. 거리 곳곳이, 아니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꽃밭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조각품들과 광장들. 단테, 조토, 브루넬레스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디, 푸치니의 고향이기도 한 피렌체. 어쩌면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만약 어린 미켈란젤로가 돌을 갖고 노는 것을 보고 그 재능을 간파한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바티칸 궁의 [최후의 만찬]과 같은 그림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랬기에 나는 베키오 궁전 앞에서 한없이 무연한 눈길을 주며 서 있었는지 모른다.
지역의 문화발전 또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국가가 주도하는 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지원은 지역의 중앙 종속만 야기할 뿐이다. 지역이 죽으면 문화의 다양성도 함께 죽는다. 음식을 예로 들어보자. 전국 각지의 음식이 똑같은 맛을 간직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굳이 그곳까지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찾아가서 음식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그 지역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색다른 맛이 우리를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가 우리로 하여금 발걸음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문화원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지역 소재의 기업과 메세나 사업을 통해 안정적이고 꾸준한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 다음 재원을 바탕으로 지역의 문화자원을 십분 활용하여 문화를 창달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이를 담당할 재능 있는 이를 발굴, 지원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지역문화원의 존립 이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