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고영직, 신동호
고영직 먼저 큰 주제부터 논의가 되었으면 합니다. ‘전통문화인가, 향토문화인가’라는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여전히 향토문화 하면 상대적으로 낙후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향토문화와 전통문화, 어떻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신동호 여러가지 논란의 소지는 있는 것 같아요. ‘전통문화’라고 했을 때 역사·문화적으로 유·무형문화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결과적으로 보면 한민족이라는 지리적 경계이든 인류학적 경계이든 간에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무형 자산을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향토사학은 아무래도 지역적 맥락, 특정한 문화권이나 행정권 안에 있는 문화적 자산들을 총칭하는 말로 쓰여왔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개념 정의는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 같고,
향토학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는 ‘지역학’ 논의도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수년 전부터 ‘향토사’ ‘향토학’ ‘향토문화’라는 용어 자체가 변방(邊方) 이미지 혹은 거칠고 투박한 이미지 등을 갖고 있어서 용어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있었고, 갈수록 지역 연구가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지역 연구 차원의 ‘지역학’을 사용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지역에서는 이미 발 빠르게 지역학 연구와 관련된 협회, 단체 등이 만들어져 있고, ‘지역학’ 하면 지역의 아이덴티티(identity)부터 넓은 범위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지방문화원이 굉장히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어서 ‘향토문화연구소’를 ‘지역학연구소’로 가져가자는 주장도 했었는데 아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사이에 일부 지방문화원을 포함해 자치단체나 학계,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지역학’과 관련된 용어 사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방문화원이 고집하던 ‘향토사’라는 것을 계속 가지고 가느냐 아니면 용어를 바꿔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통문화로 가자’ ‘향토사로 그대로 가자’ ‘지역학으로 가자’라는 논의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문화원이 ‘향토사’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원천 콘텐츠를 축척하고 발굴한 자료들이 굉장히 많은데, 이는 지방문화원의 장점이자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희 코뮤니타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방문화원 개원 이후 약 1만3천종의 자료가 발간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향토지, 비문(碑文)을 정리한 자료,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지역사를 따로 정리한 것, 전설을 정리하거나 특정 인물에 대한 연구 자료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본 자료 중 하나는 시흥 사례입니다. 기존의 향토지가 담보하고 있던 한두 권짜리 향토지(鄕土誌)가 아니라 인물, 역사, 민속부터 당대를 살았던 인물의 구술사가 담겨 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구술사에는 소래염전에서 일했던 염부들의 삶들이 담겨 있어서 이런 부분에서 지역 연구에 대한 정리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제가 개인적으로 놀랐던 것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을 지방문화원이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예로 국학진흥원이 개인이 수장할 경우 재난, 화재, 도난의 위험성이 있는 종중(宗中) 유산, 서책, 목판, 이런 것을 대신 수장해주는 수장고를 열어 아카이브를 진행 중인데 현재 10%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속도로는 수십 년 되어야 완료될 정도로 자료가 많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러한 원천 콘텐츠를 지방문화원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고, 그런 것을 포괄적으로 ‘향토사’라고 불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영직 말씀하신 것을 정리해보면 향토(학)에 대한 개념적인 혼란이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향토’라는 개념은 19세기말 독일에서 일어난 향토예술운동을 의미하는 하이마트쿤스트(Heimatkunst)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이 일본에 수입되고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이른바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할 때 ‘향토문화’라는 개념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동원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용어를 갖는 향토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왜곡되어 사용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는 외부에서 문화원을 말할 때 ‘향토문화자료의 보고’라고 하지만, 현재 문화원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의 양이나 콘텐츠들이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동호 일차적으로 문화원이 이러한 향토문화자료를 잘 활용해서 자기 사업으로 만든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향토사 대중화사업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축제나 이벤트 등 부분적인 콘텐츠 활용이 전부였습니다.
지방문화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발굴 사업으로는 지난해 [원천콘텐츠 발굴 및 지원사업]이 대규모 예산으로 시행되었지만, 외부 평가에 의하면 학제적 연구도 아니고 활용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종 이상의 원천 콘텐츠가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언론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예전에 향토사 연구는 특정한 전공을 한 학자들이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지역에 관심을 가진 향토사학자, 즉 전설이나 민담을 연구하거나 지리적 연구를 하거나 고서를 번역해서 자기 지역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방문화원마다 조직된 향토사연구소에서 활동을 해왔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전문적인 학자나 연구자들이 그 연구결과를 전문적으로 뒤집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런 자료들이 현실적으로 왜 활용되지도 않고 사업화되지도 않았는가? 첫째, 많은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는 한국문화원연합회 단위의 전국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고, 둘째 ‘향토사 대중화사업’과 같은 것들을 한 적은 있지만 그 자체가 사업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콘텐츠 활용이란 것이 아이들과 체험하는 수준이나 단순한 이벤트성 활용에 그쳤고, 콘텐츠를 각색하거나 다른 형태의 멀티콘텐츠로 활용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지방문화원 내부의 인력구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3∼4명이라는 절대적으로 적은 인원으로 문화원을 운영해야 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인력이 적다하더라도 ‘개방형 플랫폼’으로써 유연하게 외부기획자나 지역 문화예술단체와 적극적으로 네트워크를 하면서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화원은 내적으로 인력도 부족하고, 유연한 외적 개방성도 없다보니 이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영직 문화원 안팎의 문제가 동시에 작용했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지금 지방문화원실태조사를 하고 계신데 전국 단위에서의 향토문화에 대한 실상은 어떻고, 경기도만의 특징적인 현상이 있나요?
신동호 전국적으로 보면 1만3천종 정도가 향토문화자료로 발간되었고, 개별 문화원 기준으로는 평균 57종입니다. 자료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는 데가 84%, 별도 보관을 하면서 자료실을 운영하는 데가 77%, 자료 목록을 구축한 곳이 70%,
그 중 대출 가능한 곳이 65% 정도입니다. 자료실이 잘 갖춰져 있어야 활용이 가능한데 아직은 문화원의 외부 개방성이 부족합니다.
이와 관련해 예전부터 정부에 향토사자료관, 지역학자료관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도시재생이든 특정 지역연구를 하려고 할 때 ‘지역 읽기’를 하려면 자료 구하기 쉽지 않아요. 자료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없고,
문화원 발간자료 또한 ISBN을 모두 등록한 것이 아니어서 국회도서관에서도 보기 어렵습니다. 자료를 보려면 지방문화원에 직접 찾아가서 대출하거나 한 권밖에 없을 때는 문화원에서 보고 와야 했거든요.
그래서 향토사자료관 또는 지역사자료관을 만들자고 한 것이지요. 자료의 질이 다르긴 하겠지만 지역별로 분류해서 모아두고, 유형별 검색이 가능하도록 하여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라키비움(larchiveum) 기능을 가진 공간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저는 자료들을 아카이브하면서 전문적으로 재분류하고, 데이터베이스(DB)화하고, 필요한 경우 디지털화하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는 잘 안됐고, 여전히 과제로 남겨져 있는 것 같아요.
향토문화 활용과 관련해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주관으로 [한국디지털향토문화전자대전]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검색엔진에 많은 비용이 든다고 알고 있어요.
기존 향토지의 경우, 한자를 보면 그 어원을 잘 알 수 있는데다 인문지리, 전설 등을 다룰 때 행정구역을 넘어 통합적인 접근을 하거나 골짜기 골짜기마다의 이름과 이야기들이 풍부했는데, 디지털향토문화전자대전의 경우, 한자가 많이 사라지고,
읽기 편하게 만들면서 굉장히 많은 부분이 소실된 데다, 목록 구성 또한 그다지 편하지 않습니다. 지명 유래 등도 행정 단위별로 나누어져 있거나 관련 키워드로 검색해야 해서 종합적이고 연관성이 있는 읽기가 어렵게 되어 있어요.
과거 사진, 지도 등의 활용도 부족하고, 새롭게 찍은 마을 사진들도 마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어요. 디지털화를 통해 향토문화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체계적인 아카이브를 위한 목록 구성이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향토문화를 박제화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 원본성(原本性)을 많이 훼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 듭니다.
고영직 경기도만의 특이사항은 따로 없었습니까?
신동호 경기도가 다른 광역단체와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역연합회의 활동이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곳 중 하나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고영직 원자료를 가지고 현대화한다고 했을 때 단순히 쌓여 있다고 콘텐츠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자료가 문화콘텐츠로서의 의미를 갖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동호 원자료를 활용한다고 했을 때 첫 번째는 그것을 재현해서 명확한 해석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고요, 두 번째는 문화예술적으로 다른 매체나 미디어로 표현되면서 예술적 심미성을 추가해 재가공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보다 깊이 있는 연구 작업이 필요하고, 지역 간 비교분석을 하거나, 다른 사료를 찾아서 좀 더 구체화하거나 학제적 연구를 덧붙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원형 콘텐츠를 문화예술 콘텐츠로 만드는 경우인데,
대중적인 재현 중심으로 가다보니 굉장히 고답적이고 고루한 경향이 있고, 깊이 없는 단순한 체험 형태로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문화원형을 활용한다는 것은 ‘융합적인’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프로세스로 보면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큐레이터가 함께 새로운 해석적 접근을 통해
활용방안을 만든다든가, 예술가와 협력하여 표현의 방법을 새롭게 한다든가, 미디어적으로 새롭게 구현한다든가 이런 부분을 융합적으로 사고해야지, 단순히 옛날 것을 읽고 따라 해보거나 그것을 재현해보는 것은 현재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전통 복장을 한번 입었다 벗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어떤 복장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미디어적으로 만들어가는 융합적인 과정이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원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업들이 병행되어야 콘텐츠로써 활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방법으로 콘텐츠를 접근하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습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도 단순 체험, 재현, 따라하기 형태로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과도 관련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향토사에 대한 포커스의 문제인데, 향토사 연구가 근대 이전에 멈춰 있다는 것입니다. 한 100년 이상쯤 되어야만 역사라고
생각해서 지역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근대 이전에 멈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대 연구’가 거의 안 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조선시대 사료에 등장하는 지역이나 오랜 세월 전승되고 구전된 것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지만 근대사 연구도 중요합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6.25 전쟁, 새마을운동 등
이런 역사는 정리가 되었어도 지역사회 관점에서의 역사는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6.25전쟁의 경우만 봐도 지역에서 벌어진 국가전쟁, 전투라는 측면에서 정리되었지, 수많은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 마을이 겪어낸 전쟁 이야기들은
거의 없잖아요?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이런 것만 기록되었고, 실제로 민중들이 겪었던 전쟁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장(死藏)되어 있습니다. 저는 향토사 연구에서 부족한 지점이 당대(當代)에 대한 연구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영직 조금 과격하게 얘기하면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 같은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은 거의 ‘날조된 역사’ 내지는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향토사 연구가 너무 ‘근대 이전’에 멈춰 있다는 신 소장님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 있는 비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이라는 게 불과 100년도 채 안 되는 얕은 역사인 경우가 많잖아요?
지난해 부산에서 작품 활동하는 조갑상이라는 소설가가 『병산읍지 편찬약사』(창비 2017)라는 소설집을 냈습니다. 이 책을 퍽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내용인데,
소설 내용은 ‘병산읍’이라는 가상의 읍이 승격된 지 몇십 주년을 맞아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서술한다는 얘기입니다. 읍사 편찬을 위해 편찬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어느 역사학자가 국민보도연맹에 대한 주류적·보수적 역사해석을 거부하고
진보적으로 기술하면서 문제가 빚어진다는 설정입니다. 이 소설은 여전히 당대의 시각에서 역사 서술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금의 우리에게도 환기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결국, 신 소장님의 말씀은 향토사 연구에서 지금 보관되어 있는 콘텐츠를 어떻게 현재적으로 의미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시사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연구 방향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당대의 역사를 향토사료로서 새롭게 주목하고자 한다면
어떤 가치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신동호 결국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역사 해석의 주체는 누구인가를 보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카(E.H Carr)가 말하기도 했지만, 최근에 읽은 유목민 역사에 대한 책을 보면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는 유목민사를 ‘자기 역사를 갖지 못한(기록하지 못한) 차가운 사회’라고 말하더군요. 한편 우리는 너무 인류학자 혹은 실증사학적인 역사연구의 관점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기억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생깁니다. 예전에 구술(口述) 전성시대를 보면 감정과 기억을 다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우리는 단순하게 실증(實證)되지 않았거나 진본(眞本)이 없으면 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결국에 원본성과 진본성의 문제는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와 연결되는데 결국 지극히 물화(物化)된 사고방식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똑같은 맛일 수가 없고, 똑같은 의상일 수가 없는데,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동일해집니다. 실제로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죠. 어찌되었든 역사를 실증사학적으로만 보려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개인의 기억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 기억 연구도 많이 하지만, 역사를 구체화하는 방식에서 개인사에 의한 역사구축으로 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나 마을사나 지역사·향토사에서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25 전쟁만 해도 그 시기를 겪은 분들과 얘기를 나누면 저마다 장면이 다르잖아요. 개인의 기억이 존재하고, 마을이나 지역이 치러낸 기억이 있다면 개인사가 마을사가 되고, 마을사가 지역사가 되고, 지역사가 모여서 국가나 민족사가 되는 것처럼 개별의 장면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지우고 학자들이 기록한 역사를 우리는 반복해서 학습하도록 강요당해 왔잖아요.
이런 측면에서 개인이 당대를 감당했던 기억들이나 물건, 공간들을 연구하는 것들이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근현대인물 만인보(萬人譜)’를 만들자는 얘기도 했습니다. 지금 당장 활용하지 않더라도 만 명의 생애와 삶의 도구, 공간, 음식, 일상까지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갈수록 표준화, 일반화되고 있어요. 욕구도 표준화되어가고, 먹는 음식도 표준화되고 있기 때문에 복수적이고 다양한 삶의 양식들에 대한 관점이 더더욱 중요하고, 이러한 작업은 지역적 삶을 이해하는 근간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인류 역사의 마지막 구술 세대가 살아왔던 근현대의 삶의 이야기를 지금 좀 더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노인들이 돌아가시면 그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전국 단위로 이 작업을 하다보면 분명 공통성과 차별성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지역 단위의 삶이 존재할 텐데, 그 지역 연구가 당대를 살고 있는 사람, 살았던 사람을 통해서 기록되고 정리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마을 단위의 변동 과정이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소위 말하는 압축적 성장기, 새마을운동 이런 부분까지도 이제는 지역에서 연구하고, 지역별 새마을운동의 방식과 진행 과정이 정리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연구의 관점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 기획자나 예술가들의 과정 참여를 통해서 다른 형태의 콘텐츠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거나 활용될 수 있는 융합적 기획들이 함께 있어야겠죠. 기록하고 남기는 것도 중요하고, 이것을 다시 재해석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콘텐츠가 융합적으로 현재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고 활용하는 작업들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영직 우리가 (前)근대라고 말하는 시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우연성입니다. 어쩌면 근대는 우연성을 지속적으로 거세(去勢)시켜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 같은 학자도 말했지만 우리가 비근대, 전근대라고 치부하는 민중들의 기억 속에 담겨져 있는 삶의 우연성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소위 스토리텔링화나 문화콘텐츠화 과정에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특이사항입니다.
그런데 이 우연성의 가치가 지금의 향토문화 연구에서는 간과 내지는 결여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우연성의 가치를 지금이라도 새롭게 주목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문화원형들을 문화기획자나 예술가와 융합적인 기획을 통해 재해석하는 과정도 필요하고,
당대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 같습니다.
신동호 저는 경기도문화원연합회가 의지가 있다면 이런 부분부터 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재미있게 본 것 중 하나는 제주도의 ‘다랑쉬오름’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가도 바위 하나를 두고 A라는 할아버지와 B라는 할아버지가
바위의 지명과 유래를 두고 다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랑쉬오름도 마찬가지로 여러 해석들이 존재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다랑쉬오름에 대한 설명에서 ‘다랑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마을의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다랑쉬오름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다랑쉬라 불여졌다는 설(說)이 가장 정겹다’라고 되어 있어요. 맞고, 틀리다가 아니고 ‘정겹다’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저는 이 표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 이게 지역을 바라보고,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나의 기억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잖아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같이 겪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사실(fact)에만 집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A와 B와 C의 기억의 공존을 같이 다룰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영직 좋은 지적이십니다.
신동호 결국, 근대의 국가주의적 담론이 ‘맞고, 틀리다’는 결론을 내도록 만들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제가 마을에서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국가가 없어져도 마을은 지속된다’ ‘마을이 국가보다 더 오래되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더러 500년, 1000년 이상 지속된 마을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국가는 여러 번 바뀌었어도 마을의 삶의 양식이나 지리적 범위, 바위나 산, 나무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랬을 때 국가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고영직 그런 국가주의 담론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지금의 행정 지명인 것 같은데요. 일테면 파주의 경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LG그룹에서 만든 LCD공장이 있는 곳의 도로명이 ‘파주LCD로(路)’에요.
이런 행정적 폭력은 그 지역의 장소성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는 거죠.
신동호 사실 문체부와 지방문화원이 회의할 때 지명(地名) 복원하는 작업을 지방문화원에서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그냥 복원만 하는 게 아니라 지명석(地名石)을 만들거나 예술가와 결합해서 조형물을 만들거나 하는 형태로
해보자는 제안이었어요. 저 유서 깊은 봉화군에 ‘파인토피아로’가 있어요. 소나무+유토피아가 파인토피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것처럼 저희 집이 있는 도로도 ‘국채보상로’인데 집에 갈 때마다 국채를 갚아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웃음) 하지만 제가 사는 동네는 느린 마을이라는 뜻의 ‘만촌동(晩村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따로 있어요. 삶의 공간성이 분명히 있고, 공간에 대해 느끼는 느낌이 분명 있을 텐데, 도로명을 바꿈으로써 그조차도 환기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고영직 문화원에서 향토문화자료를 아카이브만 하지 말고, 어떻게 활용하고 더 연구하고 현재적으로 의미화할 것인가에 대한 숙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동호 앞에서 언급했지만, 지방문화원이 유연한 조직, 개방형 플랫폼 형태로 변하지 않으면 지금의 상황으로는 변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조직에 사람을 늘려서 업무를 가져가는 방식보다는 ‘플랫폼 형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문화재단도 마찬가지에요. 좋은 사업이 있으면 이 사업을 잘할 수 있는 민간 파트너와 협업구조를 만들어서 민간과 함께 성장하는 민간 생태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끊임없이 민간 생태계를 실험대에 올려놓고 개인과 단체를 경쟁하게 만드는 형태의 지원구조로는 지역 생태계를 만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개인과 단체는 경쟁하지만 그 경쟁의 수월성, 차별성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문화예술지원이라면 이 부분에서 전면적으로 바뀌어야합니다. 지방문화원이 일을 하는 방식도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아웃소싱을 하긴 하지만, 지금 있는 직원들이 행정 관리를 하고 지방문화원에 위임된 사항을 전달하는 일만 해도 바쁩니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한 사업을 할 때 정말 잘할 수 있는 문화기획자 등과 협업구조를 짜고 이들이 협업해서 진행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들을 같이 보고 연구하고 해석해서 그것을 다시 문화예술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과정들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하려면 인원을 충원하는 것보다 사업 자체를 ‘개방형 플랫폼’ 형태로 진행하는 것이 더 현실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 문화예술기관도 마찬가지이고요. 민간을 경쟁시켜서 우월적 지위를 갖는 단체와 조직을 만들어내는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문화생태계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정책 차원에서 풀기 위해 저는 계속 ‘지역단위 문화위원회’를 만들자고 주장합니다. 최소한 100명 이상이 참여하는 문화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문화정책은 시민과 함께 해야 하거든요. 예술계가 참여하고, 문화기획자와 공공기반시설, 민간시설,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10명~20명 정도는 제비뽑기해서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재단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들도 정책 결정의 당위성을 획득할 수 있고, 향후 문화예산의 당위성도 여기서 확보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번 실태조사를 하며 지방문화원 발전방안에서 다룰 예정이지만, 제가 지방문화원에 대해 가장 세게 하는 주장은 이렇습니다. 지금의 지방문화원은 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합리적 아비투스(Habitus)’가 지배하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문화원도 많이 있고, 원장이 바뀐다고 되겠냐는 말도 하지만, 저는 문화전문가들이 문화원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문화재단 같은 다른 문화기관들처럼 원장 유급(有給) 공채제도로 가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고 봅니다.
이사회 구조도 시민평의회처럼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 시민이 참여해 지방문화원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 보다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울러 지방문화원이 백화점 식으로 이런저런 지원사업을 수행하는 것보다 전통문화,
향토문화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 전통문화, 향토문화를 발굴하고 활용하는 데 기반한 사업들을 기획하면서 전통문화, 향토문화에 대한 권위를 더욱더 갖고 있는 기관으로 거듭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고영직 경기도문화원연합회 차원에서도 방금 말씀하신 개방형 플랫폼 구조로 가기 위한 인력구조를 위해서 ‘마을큐레이터 양성’ 같은 사업도 하고 있고, 향토문화연구소의 내실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권 시대를 맞았고, 자치 시대를 맞아 지역에서 여러 사업들을 수행할 만한 인력 문제가 부각됩니다. 말씀하신 개방형 플랫폼 구조로 가려면 지역의 역량도 매우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럼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서 ‘전통문화냐, 향토문화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공론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마르크 오제(Marc Augé)라는 프랑스 인류학자가 이야기하는
‘지금 여기의 문화인류학’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비장소(非-場所, non-lieux, non-places)라는 말을 씁니다. 어쩌면 비장소라는 말에서 향토문화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근대에 와서 거세된 가치 중 하나가 삶의 우연적인 요소들, 우연성이라는 것들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복원되어야 할까 하는 관점에서 콘텐츠나 사업을 기획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또 문화원형이라는 말도 좀 이상합니다.
모든 게 섞이고 섞여서 탄생한 것이 문화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딱딱하고 견고한 생각의 틀을 부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려면 균열을 내는 작은 실천들이 필요한데 혹시 최근에 주목해서 보신 케이스(case)가 있다면 이야기해 주시죠.
신동호 다시 돌아가서 전통문화, 향토문화를 바라보는 국가주의적 태도 아니면 물화된 사고, 이런 것들을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의 방법이 저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개인의 눈높이 혹은 지역 내부의 연구자의 눈높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결국 지역 연구는 자기 지역을 말하고, ‘나’에 대한 사유 과정이 될 텐데 그런 부분을 어떻게 알리고, 지역민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이런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이 단순히 어떤 동(洞)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서사 속에서 지역의 서사가 녹여지는 과정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삶의 장소성과 비장소성이 분명 공존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이미 발굴된 콘텐츠를 지역민과 공유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은 근대 이후의 삶을 연구하는 것이죠. 그것은 결국 나, 이웃, 혹은 우리 마을에 대한 관심일 텐데 ‘나’가 아닌 것을 드러내면서 온전한 ‘나’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나’와 관련된 수많은 ‘타자’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결국은 내 삶이 독특한 혼자만의 삶인 것 같지만, 사실 수많은 타자들이 녹여지고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삶이란 것을 인정해야 될 것이고, ‘나’ 아닌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이웃’을 발견하는 것들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저는 경기도라도 먼저 이 근현대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시민들의 이야기, 주민들의 이야기, 이런 것들이 지역의 서사로 녹여지고 구축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영직 오늘 나눈 대화를 통해 구체적인 답은 아니더라도 경기도문화원연합회 산하 향토문화연구소 활성화 방안이라든가 지방문화원의 사업방향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말한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 개념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의 기억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문화변동 시대에 비장소의 미래 또한 중요하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의 문화인류학’이란 관점을 도입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