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성 복
평택문화원 사무국장
평택향토사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수도권, 충청권과 강원 일부를 아우르는 풍물, 웃다리 평택농악
일찍이 이 땅의 사람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하여 농사를 기려왔다. 그럼으로 농악을 가상히 여겨왔고, 장구한 역사와 전통위에서 상식화되고 나아가 고유한 지방색을 띠며 향토문화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렀다. 농악은 우리 선조들의 감정과 직감이 낳은 문화유산이며, 우리민족의 심성이 가장 잘 표현된 민중의 음악이요 춤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농악은 크게 평택농악이 속한 웃다리농악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산악지역의 호남좌도농악, 전라도 평야지역의 호남우도농악, 경상도 지방의 영남농악, 태백산맥 너머의 영동농악 등으로 나누어진다.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의 대표성을 인정받은 농악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 6개의 농악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이다.
특히 웃다리농악은 경기도를 포함하여 서울, 인천 수도권과 대전·충청지방, 강원도 영서지방에 전승되는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충청, 강원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농악으로 1985년 12월 1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로 지정되었다.
평택농악은 두레풍물과 걸립풍물굿을 가장 잘 계승한 웃다리 지역을 대표할만한 풍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두레농악에서 하던 지신밟기, 두레굿과 더불어 난장굿, 절걸립, 촌걸립 등 걸립패에서 하던 전문연희패적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형태이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彭城邑) 평궁리(平宮里)는 평택시내에서 남서쪽으로 2㎞쯤 떨어져 있는 농촌마을이며 행정구역은 팽성읍에 소속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옛 부터 지신(地神)밟기, 두레 굿 등 여러 농악을 세게 쳤다. ‘평택농악(平澤農樂)’ 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 시절 대통령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였다. 평택농악의 명인 최은창(崔殷昌) 선생은 당시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패를 구성해 ‘평택농악’ 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나갔다. 지금의 광화문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평택농악은 1958년과 1959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평택농악의 이름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된 것이다.
평택농악의 계보를 이야기 하자면 유세기 선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세기 선생은 1893년 태어나 전국 5대 남사당 놀이패인 진위패를 육성한 가문으로 농악, 시조 등에 조예가 깊어 제1대 한국농악협회장까지 역임했으며, 유세기의 부친은 당시 봉남리 진위현청 앞에서 솥을 만들어 파는 솥전을 대대적으로 경영하는데 전국에서 농악에 소질 있는 자들을 종업원으로 등용하여 평소에 농악을 연마시켰다. 조선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자 경복궁 건축 위안공연에서 대원군으로부터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라는 농기(都大房旗)와 3색의 어깨띠를 하사받고, 당시 상쇠 김덕일에게 ‘오위장(五衛將)’이란 벼슬을 내려준 사실이 있어 그 당시에는 진위농악이 경기농악을 대표했으며, 전국에서도 유명한 존재였던 것이다.
평택농악이 현재와 같은 편제를 갖춘 것은 1980년대부터다. 지금은 작고한 상쇠 최은창(崔殷昌) 선생과 수법고 이돌천(李乭川) 선생 등 명인들이 평택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살면서 농악을 쳤으며, 1980년에는 최은창 선생이 중심이 되어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참가해 특별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1985년 12월 최은창, 이돌천 선생이 평택농악 예능보유자가 됐으며, 이듬해인 1986년 12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 평택농악의 보유단체로 평택농악보존회가 지정받게 된다.
웃다리 평택농악을 일궈낸 명인들
지금의 평택농악이 있기까지 큰 업적인 남긴 최은창(崔殷昌) 선생은 1914년 4월 18일 평택군 팽성면 원정리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부친 최상순 씨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출생 직후 평택농악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평궁리로 이주한 후 마을 둥기래패(두레패) 상쇠에게서 꽹과리를 배워 16세 때 두레패의 꽹과리를 쳤고, 26세 때에는 이원보 상쇠에게서 장구와 꽹과리를 배웠으며, 이원보 농악단의 끝쇠를 쳤다.
성인이 되면서 마을단위를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연희패에 가담하게 되고, 절걸립패에도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하여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서 활동을 하였다. 그러면서 장고잽이로 비나리꾼으로 쇠꾼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40세 때에는 남운룡악단(南雲龍樂團)에 들어가 장구를 치다가 부쇠를 쳤다. 48세 때에는 절걸립패 상쇠로 나서서 북한산 태고사, 인천 연화사 등 수 많은 절의 중수에 절걸립패를 이끌고 시주를 걷었다. 이후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하던 최은창 선생은 1985년부터 평택농악 상쇠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다 2002년 작고했다.
최은창 선생과 함께 평택농악을 이끌어 온 이돌천(李乭川) 선생은 장호원에서 태어나 10세때 천안으로 이주해 16세 때 마을 상쇠에게서 쇠를 배워 쳤고, 17세 때에는 충북 출신의 박지삼에게서 법고를 배웠다. 18세 때에는 남운룡(南雲龍) 밑에서 법고를 배워 남운룡농악단의 법고수로 있었다. 그 뒤 평택농악과 천안농악에서 적을 두었으며, 1980년 평택농악을 공식 결성할 때 합류해 1985년 법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활동해오다 1994년 작고했다.
현재 평택농악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김용래(金容來) 선생은 천안에서 태어나 13살 때 용곡마을 두레패에서 무동으로 농악에 입문해 16세부터 대전 송순갑 행중과 안성 남운형 행중에서 활동하다 18세때 상모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스승이 바로 평택농악의 명인 이돌천 선생이다. ‘남사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82년 평택농악에 들어왔으며, 2008년 평택농악 법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으면서 팽성읍 평궁리 평택농악전수회관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겨와 살고 있다.<사진-7>
이밖에도 평택농악의 초창기 단원으로는 방오봉, 김육동, 유준, 황홍엽, 이성호, 이경일, 이민조 선생 등이 있으며, 안성남사당보존회 회장인 김기복 선생도 오랜 기간 평택농악단에서 활동했다.
두레와 걸립이 만난 전문연희패 웃다리 평택농악
평택농악은 두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최은창 선생이 평생 거주해 온 평궁리, 넓게 잡아도 평택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던 마을 두레패 성격의 농악이요, 또 하나는 최은창 선생이 성인이 된 이후 넓은 지역을 유랑하면서 활동하던 전문연희패 성격의 농악이다. 평택농악이 두레패의 성격에만 머물렀다면 웃다리 지역을 포괄하는 농악으로서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 했을 것이요, 전문연희패의 성격만 가지고 있었다면 농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두레농악의 대동적 신명을 가지지 못 했을 것이다.
웃다리 평택농악은 가락의 종류가 많지 않은 반면 변주가 다양하다. 또한 가락이 빠르고 힘이 있으며 맺고 끊음이 분명한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독특한 가락으로는 칠채와 잦은삼채라 불리는 쩍쩍이가 있다. 판굿은 굿패들이 여러 가지 놀이와 진풀이를 순서대로 짜서 갖은 기예를 보여주기 위하여 벌이는 풍물놀이이다.
웃다리 판굿은 보통 45명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농기와 영기를 앞세우고 호적수가 따르며 그 뒤로 쇠, 징, 장고, 북, 법고, 무동 등이 이어진다. 평택농악의 판굿은 진풀이가 다양하고 화려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당산벌림 대형과 무동놀이가 가장 큰 특징이다.
무동놀이는 웃다리 평택농악의 백미
평택지역에서는 정초에 지신밟기, 여름철에 두레굿, 겨울철에 걸립굿에 농악을 크게 쳤고, 초파일에 등대굿, 단오날에 난장굿을 쳐왔다. 마을굿인 대동굿(당굿)은 만신이 하였으며, 전라도에서 행했던 섣달그믐 밤에 치는 매굿은 이 고장에서는 치지 않았다.
● 지신밟기
지신밟기는 정초에 마을의 풍물패가 모여 집집마다 돌면서 풍물을 치고 지신을 밟아주며 고사를 해주고 쌀과 돈을 추렴하는 세시풍속으로 정월 2, 3일부터 보름까지 하는데 섣달에 풍물을 장만하여 두었다가 정초에 지신 밟는 날 오전에 쇠꾼들이 서낭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당에 가서 당굿을, 마을의 큰 우물에 가서 샘굿을 치고 집집이 집돌이를 한다.
● 두레굿
두레굿은 두렛일을 할 때 협동심을 북돋우고 힘든 노동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힘을 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두레굿은 모내기에서 시작되어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날까지 주로 행해졌다.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백중날은 백중놀이 또는 호미씻이라고 하여 마을 공터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풍물을 치며 걸판지게 논다. 그 동안에 힘들었던 노동의 피로를 마음껏 풀어내는 것으로 두레에 두레풍장이 딸린다. 평택농악의 두레굿은 1984년 최은창 선생이 주도해 평택농악보존회에서 처음으로 복원한 후 매년 평택군민의 날 때 백중놀이의 하나로 재연해 보였다.
● 걸립굿
걸립굿은 촌걸립패와 절걸립패가 가장 흔하다. 촌걸립은 어떤 공동체에서 공동의 기금을 마련하거나 특별한 경비를 모을 필요가 있을 때, 전문연희패와 계약을 맺는다. 연희패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고사를 통해 축원 등을 해 주며 그 대가로 돈이나 곡식을 받는다. 모아진 재물은 걸립을 요청한 쪽과 연희패가 계약에서 정한 지분대로 나눈다.
절걸립패는 사찰을 수리하거나 중수하는 등 절에서 쓸 비용마련을 위해 절과 연희패 간에 계약을 맺고 행하는 걸립이다. 연희보다는 고사를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이름난 고사꾼들은 대개 절걸립패에 많았다. 쇠꾼들을 많이 쓰면 진행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 행중은 대개 7~8명으로 많아야 10명을 넘지 않는 소규모였다.
● 난장굿
난장굿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날 외에 임시로 특별히 열리는 장날에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평택지역에서는 주로 명절을 맞아 난장을 텄으니 ‘파일난장’ ‘백중난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난장이 열릴 때, 보다 많은 상인들과 사람들을 끌어보아 시장이 활발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사람들에게 보여줄 거리가 필요했다. 이런 목적으로 전문적인 기예를 가진 풍물단체를 불러다가 장터 한가운데서 굿을 놀게 했으니 이것이 난장굿이다. 파일날에 연희를 놀면 파일난장굿이고, 백중날에 놀면 백중난장굿이라고 했다.
● 판굿
판굿은 굿패들이 여러 가지 놀이와 진풀이를 순서대로 짜서 갖은 기예와 재주를 보여주기 위하여 벌이는 것으로 지신밟기나 걸립을 하면서 집집마다 마당씻이로 하던 농악놀이가 확대된 것인데 본격적으로 판굿이 발달한 것은 전문연희패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평택농악의 판굿은 인사굿-돌림법고-당산벌림1-오방진-당산벌림2-사통백이-합동 좌우치기-가새발림-쩍쩍이 춤(연풍대)-돌림법고-개인놀이(따법고, 장고놀이, 상쇠놀이)-버나놀이-무동놀이-열두발 상모놀이(채상놀이)-인사굿 순으로 진행된다.
평택농악의 판굿은 빠르고 힘 있는 가락에 맞추어 진풀이도 생동감이 넘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전문연희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굿패 구성원 개인의 만족보다는 구경꾼들과 함께 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특히 다양하게 펼쳐지는 무동놀이(동리)는 평택농악 판굿의 백미다. 맞동리로 시작하는 무동놀이는 던질사위, 3무동, 만경창파 돛대사위, 앞뒤곤두, 5무동의 곡마단과 동거리 등으로 이어지면서 구경꾼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이다.
● 고사소리
평택농악은 결립을 주로 했던 전문연희패의 성격상 고사소리 즉 비나리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평택농악의 예능보유자였던 최은창 선생은 그 시대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비나리꾼으로 인정받았다. 지신밟기나 걸립을 할 때, 화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기를 비는 사설이 여러 군데 들어간다. 이 중 짧고 간단한 것을 지신풀이라고 하며, 마지막 대청마루에 차려놓은 고사상 앞에서 하는 소리를 보통 고사소리 또는 비나리라고 한다.
최은창 선생과 더불어 이성호 선생도 고사의 명인으로 오늘날 사물놀이패 비나리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장고잽이이긴 하지만 이영옥 선생의 고사소리도 걸쭉했고, 김용래, 김육동, 이영옥 선생이 받아주는 뒷소리는 고사꾼의 소리를 푸짐하게 받쳐준다. 김용래 선생이 치는 고사반주 북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정평이 나 있다.
세계에 울려 퍼지는 웃다리 평택농악 가락
평택농악은 최근 들어 단원들의 기량이 급속도로 향상되고 있다. 이는 2004년 발족한 평택농악발전연구회의 연구 활동과 이에 대한 성과가 하나 둘 표출되면서 부터이다. ‘평택농악의 전통 보존 및 발전적 계승 방안’에 대한 연구를 2년여에 거쳐 지속해왔으며, 연구 결과를 평택농악 발전을 위해 하나 하나 적용한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 대한민국 최초로 ‘평택시 무형문화재 보존 및 지원조례’를 제정한 것을 시작으로 평택농악을 비롯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5대 농악이 한자리에 모여 판굿을 벌이는 ‘대한민국무형문화재축제’ 개최, 평택농악 단원들의 전문성을 높이고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전수활동에 전력할 수 있도록 시행한 ‘상임단원 제도’, 평택호에 착공해 2011년말 준공한 평택농악마을 등은 평택농악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평택농악은 또 매년 100여회가 넘는 국내 공연과 함께 4~5차례의 해외 초청공연을 펼치고 있다. 대만 세계타악페스티벌, 터키 체리축제, 중국 상해아트페스티벌, 일본 마쯔리축제, 독일 카느발데아쿨투언 등 해외 초청공연을 통해 평택은 물론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를 계기로 평택농악은 2012년 올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정부와 함께 추진해나가고 있다.
평택은 오래전부터 국보급 예인들을 많이 배출했던 곳이다. 평택농악을 만들어낸 산 증인 최은창 선생과 이돌천 선생은 평택농악과 함께 농고동락을 하다 생을 마감했으며, 현재는 김용래 선생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이전에는 평택군 송탄면 출신의 호적 잽이 송창선 선생이 남사당 꼭두각시로 활동했으며, 포승면 출신의 지영희 선생은 해금 시나위의의 명인으로 우리나라 국악을 체계화 시킨 국악계의 선각자로 불린다. 또 판소리 중고제의 명인으로 조선 후기 8대 명창으로 분류됐던 모흥갑 선생은 평택에서 태어나 활동했으며,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으로 말년에 10여년간 평택에 거주하며 판소리에 열중하다 작고한 명창 이동백 선생은 동편제의 거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일곱 분이 평택에서 태어났거나 적을 두며 활동해온 인간문화재들이니 평택은 가히 예향의 고장이라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평택은 질박한 서민의 정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인을 껴안을 줄 알고, 그들이 터를 잡아 생활하도록 배려할 줄 아는 문화적 토양을 갖고 있는 고장이다. 이러한 토양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평택농악과 같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세계적 문화자원으로 뿌리내리고 번성하는데 자양분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