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양성 첫걸음
이 기획시리즈는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진행합니다. 문화사업과 활동에 있어 어느덧 중요한 가치로 자리한 문화다양성. 이주민사업을 칭하는 다문화사업과 달리 문화다양성은 더 넓은 영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리즈로서 연재하는 이 문화다양성 기획은 문화다양성에 관심을 가진 분들을 위한 이야기자리가 될 것입니다.
문화다양성 한발 더 들어가기
최혜자 | 성공회대학교대우교수/문화디자인자리대표
1. 다양성이 상실 된 문화
지난 글에서 문화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다양성의 상실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겪은 구체적 현실이었습니다. 유럽과 같은 나라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아직도 지구상의 많은 나라에서는 현재 진행형의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가 근대국가체제, 관료 시스템, 근대교육제도 등을 통한 국가 건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기존과 다른 강력한 권력을 구축할때, 가치와 질서를 통합하는 이념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념이 다른 이념을 압도하거나, 다른 이념을 제거하는 유일한 이념으로 작동하게 되면 사회적 획일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획일성이 정형화되고, 자본주의의 진전으로 상업화가 가속화될수록 다양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 다양성을 훼손하는 것들
유럽의 여러 나라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도 그러한 획일적 이념 속에 다양성은 불필요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물론, 부탄과 같은 나라는 그러한 근대 자체를 마치 건너뛸 것 같은 접근을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겪는 방식이 다양합니다. 그 다양함으로 인해 나라마다의 문화다양성의 내용과 깊이, 정도가 다릅니다. 우리사회에서 제기되는 문화다양성을 과제를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2. 문화적 맥락과 문화다양성
유럽사회는 300년 동안 근대화 시대를 겪었습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의 인생 안에서 다양성이 상실된 경험이 일어난 것도 아니며, 다양성이 증대된 것도 아닙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변화한 것이며, 그러한 변화는 역사적 설명을 통해 이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조금 다릅니다.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 획일화되는 시대를 겪었고, 다시 다양성이 증대되는 사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즘 많이 읽히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그러한 모습을 추적해보면 한층 확실합니다.
△ “82년생 김지영”의 표지
김지영은 1982년생으로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김지영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 현실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항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에게는 보다 평등하고 다양한 사회가 펼쳐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김지영의 엄마 오희숙 여사는 이제 초로의 여성으로 우리의 현대 역사를 고스란히 겪은 여성입니다. 어릴 적 근대화바람을 타고 공장에 나와 돈을 벌어 남자 형제들을 가르쳤고, 잘난 남자 형제와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사는 중산층 여성입니다. 오희숙 여사는 혼자 야학으로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공무원남편을 만나 시모를 봉양하고 살았고, 딸 둘에 겨우 아들 하나를 낳아 면피(?)를 한 사람입니다. 오여사는 전업주부였지만, 가계를 위해 화장품 방판, 야쿠르트 배달을 하는 다른 아줌마들처럼 가내 부업, 야매 미용실로 아이들 학비를 번 이름 없는 가계 부양자입니다. 그리고 두 딸과 손주들의 삶이 변화를 보면서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삶의 다양성이 열리는 시대를 만나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여전히 여성에게 닫혀있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는 오희숙 여사가 겪은 삶의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1960-70년대 이후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었고, 1990-2000년을 경과하면서 다시 새로운 가치로 해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그러한 삶을 산 사람이나 그러한 삶을 산 사람들의 자녀와 손주로 구성되어 어떠한 형태이건 획일적 가치와 삶에 대한 강요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다양한 삶의 가치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하는 장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문화다양성은 “표현의 다양성”으로부터 “삶의 다양성으로”
세대를 나누어서 사회적 변화를 흡수한 유럽사회와 달리 우리사회는 개인의 삶에 대한 오해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말이 쉬어서 오해이지, 사실 삶에 가해진 사회적 폭력에 대한 규명과 화해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유럽과 다른 우리나라 문화다양성 담론의 중요한 핵심 내용입니다.
△ 문화다양성의 영역
문화다양성은 일상의 영역과 사회적 영역 그리고 문화적 영역에서 다양하게 작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영역에서의 변화 없이 사회적, 문화적 변화는 다시 개인과 관계의 굴절을 낳게 됩니다. 따라서 문화다양성은 일상의 영역 즉, 주체의 삶과 생각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고 사회적 표현을 통해 자신의 삶 안에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문화다양성선언에서는 “문화권”이라고 명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문화적 권리를 가지며 이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인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문화다양성은 개인의 문화권에 기초해야 하며, 이렇게 될 때 표현과 삶의 다양성이 확장될 것입니다.
△ 문체부에서 지원하는 문화다양성 워크숍 장면
4. 표현되는 삶, 삶의 다양성으로
우리 사회는 촛불시민에 의해 새로운 사회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거대한 정치적 변화인 듯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염원과 관계가 변화한 것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이미 자신의 문화적 권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블랙리스트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정권의 코드에 맞지 않는 예술인을 배제하는 리스트를 가지고 관리했다는 이 사건은 단지 예술인 탄압 혹은 삐뚤어진 문화예술정책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은 이 사회의 표현 영역의 가장 앞에 선 영역입니다. 흔히 우리는 TV나 영화 혹은 광고, 음악 등을 통해 새로운 시선과 방식을 수용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러한 영역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삶의 다양성을 훼손한 일대 사건입니다.
문화다양성은 단지 표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표현 속에 있는 삶의 가치, 일상의 가치를 발견하고, 스스로 그러한 삶의 주체로 사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문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문화다양성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재구성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이웃을 발견하는 가치입니다. 이것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단체인 문화원도 다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