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영 직 | 문학평론가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2016년 6월 28일, 서울시는 시민 모두의 행복을 위한 《비전 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 계획안》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이 계획안에서 개인/공동체/지역/도시 차원에서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한 도시가 핵심적으로 공유하고 추구하려는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각 단위별로 설정한 목표는 다음과 같다. 먼저 개인 차원에서는 삶을 기획하는 시민문화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주권’을 표방하고 있으며, 공동체 차원에서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공동체 문화를 위해 ‘문화공생’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지역 차원에서는 재생(再生)을 통한 문화적 지역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문화재생’을 강조했으며, 도시 차원에서는 지속가능한 문화를 위한 ‘문화창조’에 역점을 두고 있다.
비전 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계획안
서울시는 이와 같은 《비전 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 계획안》 수립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의하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기본 계획안의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였다. 나 역시 계획안 수립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자문회의에 응한 바 있고, 한 도시(나라)의 문화정책은 이제는 성장사회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탈성장사회(세르주 라투슈)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무엇보다 이번에 발표한 서울시 ‘비전 2030’ 계획안이 기존의 《2015 문화도시 기본계획》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도시의 문화적 발전”을 강조한 예전 계획안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강조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서울시 문화정책의 이러한 방향전환은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고, 창조적 장소(Creative Placemaking)를 구축하려는 도시정책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갈수록 무연(無緣)사회화하는 사회에서 가장 큰 병통은 관계의 빈곤이라는 점에서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문화정책의 기조로 선택한 서울시의 비전 2030 계획은 오히려 참신하다. 개인의 건강, 자아실현, 가족을 매개로 한 새로운 가치관 형성, 고령(화) 사회로의 진화, 사회적 양극화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치유활동 증가와 대안적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 등의 구체적 정책들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는 점차 개인의 행복과 문화적 권리를 중심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문화의 기능은 이미 존재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구를 창조하는 동시에 기존의 욕구들이 영원히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도록 하는 것으로 바뀌는 양상이다. 세계화와 대규모 이주와 인구의 혼합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힘의 등장에 따라 문화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메갈로폴리스 서울의 경우 요동치는 문화변동은 우리나라 어떤 도시보다 더 실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서울시는 시민 개개인의 행복에 역점을 두면서도 지역과 도시 차원에서 공동체의 재생과 복원을 강조하는 도시 비전을 수립하고자 한다. 이것은 정책적 모순일까. 그렇지 않다. 이제 개인은 도시와 직접 관계하는 대신에, 공동체와 지역을 매개로 하여 도시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재생 중심의 도시 발전, 지역을 매개로 한 공동체적 관계 복원, 다양한 온-오프라인 공동체 형성은 이제 탈성장 시대(저성장 시대가 아니라!)의 핵심적 문화적 문법이다. 소위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이 2008년 금융 위기 이래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수년 전부터 서울시가 공유도시를 표방하며 사람과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원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도시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환상은 금물이다. 계획은 계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울시 비전 2030 수립은 우리나라 도시비전 차원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한 것은 분명하지만, 개인-공동체-지역-도시를 서로 연결해 새로운 도시 정체성을 만들고, 시민들이 함께 부르는 합창(合唱)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몫이다. 결국, 도시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만든다. 우리는 자주 이 자명한 사실을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점에서 “도시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시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페인어 푸에블로(pueblo)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마을’이나 ‘도시’를 뜻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뜻하는 말도 된다. 이 의미를 풀어보면 “도시(마을)는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도시 비전과 정책 수립 그리고 도시 정체성 측면에서 푸에블로라는 말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충분히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다
한 도시의 문화는 예술가(단체)와 대중이 만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서비스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정책에서 비롯한다. 예술가와 예술단체의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기 위한 단계적이고 연속적인 지원을 강화해야 하며, 장르 중심의 지원 시스템에서 탈피하여 지역 내 다양한 분야의 장르 간, 단체 간 협력 사업을 강화하고 우선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문화정책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한 생활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 요청된다. 특히 생활문화를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의 측면에서 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라이프스타일은 지금의 삶과는 좀 ‘다르게’ 살고 싶어 하고, 지금의 문명과는 좀 ‘다른’ 문명의 바깥을 상상하려는 우리 욕망행위와 관련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가 정의한 일상성에 대한 재(再)전유를 통해 내 안의 리듬과 우리 사회의 리듬을 바꾸려는 시도들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생활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결국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좋은 사회인가에 대한 고민들과 접속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문화 지원사업에 대한 정부/지자체(광역/기초문화재단)의 과도한 관심이 공급자 위주의 시선으로 새로운 정책사업을 ‘사업화’하고자 하는 고민일 뿐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생활문화 지원사업은 여가사회 담론의 맥락 안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여가사회 담론이란 기존의 견고한 노동사회 담론을 전제한다. 그런 여가사회 담론의 관점에서는 생활문화정책이란 물량 위주의 사업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발상이 현실화될 우려가 매우 높다. 그럴 경우 외부의 힘에 덜 의존하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상의 문화를 향유하고 창조하겠다는 취지와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고, 생활문화 현장 또한 지원제도의 덫에 갇히게 된다. ‘최소한의’ 행정으로도 잘 돌아가는 생활문화활동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요구해야 하는 동시에, 생활문화 사업의 ‘자폐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문화활동을 통해 일상의 문화를 가꾸고 바꾼다는 것이 결국 무엇에 대한 자율성이고, 무엇을 위한 자율성인가를 묻는 질문의 과정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의 과정이 없는 생활문화정책/활동은 쉽게 외풍(外風)에 의해 무너진다. 어쩌면 그런 질문을 품은 사람들이 나 자신의 일상을 바꾸고, 동네(지역)를 바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활문화센터의 경우 ‘공간이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점에 대해 더 숙고해야 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공간에서 협력 자체가 예술이 되는 삶-예술의 경지를 일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놀 터’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공간을 우리는 창조적 공유지라고 부른다. 결국, 사람을 키워야 하는 것이고, 시민과 지방정부 간에 거버넌스의 회복과 부활이 필요하다. 미국 교육자 파커 J. 파머가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와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2016년부터 경기도문화원연합회가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거버넌스를 구축하며 추진하는 생활문화플랫폼 사업을 비롯해 생활문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해온 <생활문화 다시보기> 프로젝트는 다음 스텝의 정책사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생활문화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인 민주주의적 감수성 제고와 시민성의 형성·강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생활문화활동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고, 예술·생태·지역을 비롯한 주요한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 또한 역부족하다. 전국에 수많은 생활문화 동아리들이 있지만, 대체로 자족적인 활동으로 그치고 마는 것은 우리들의 작은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시민성 형성과 강화라는 관점과 목표의 부재에서 비롯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시민 개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해진 시절을 맞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매우 중요한데, 어떻게 개인의 주체성과 내면성을 형성하고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섬세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자신이 사는 커뮤니티와 어떻게 접속되고 연결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어쩌면 이러한 고민은 예술성의 강화로도 나타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생활문화활동에서 활동을 하면 할수록 예술성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착하지 않은 착함의 예술 활동에 대한 현장의 요구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활동 기간 내내 자원 활동인가, 자원봉사인가 회의하고 갈등하다 착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솔가와이란이 부른 노래 <같이 산다는 건>의 가사를 음미하는 것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같이 산다는 건 날 덜어내고 너를 채우는 일 / 같이 산다는 건 내 우주 너의 우주 만나는 일.”
<생활문화 다시보기>를 넘어 생활문화지원사업의 다음 스텝을 고민하는 경기도문화원연합회의 즐거운 분투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는 경기도문화원연합회의 활동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옛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활동이 되기를 바란다. 새 술은 언제나 차고 넘치며, 새 부대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미리부터 새 부대의 운명을 걱정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 중요한 태도는 ‘행동 먼저, 생각은 나중에’ 하겠다는 담대한 용기일지 모르겠다. 나는 이 우연성의 힘을 여전히 신뢰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꽉 차인 계획표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