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2일에 개최된 경기지역학포럼 중 ‘경기서부지역에서 전개된 의병 전쟁’토론회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좌장 김장환
‘경기서부지역에서 전개된 의병 전쟁’을 주제로 토론 시간을 갖겠다.
신창희
먼저 경기도 독립운동에서 특히 의병전쟁. 그 소중한 자료를 제시해주시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주신 점에 대해서 감사드린다. 경기지역학 포럼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진행된 학술대회인 만큼 지역학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사회적 공간이 있다고 하면 광의의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또 협의의 공간이 있다. 협의의 공간들은 각각 충돌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고 신설되기도 하고 퇴행되기도 하면서 재구성되어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가, 사회에 대한 천착도 중요하지만 지역학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지만 새로운 지각과 역사에 대한 재구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기도 의병전쟁, 나아가 독립운동은 민족운동이고 민족 해방운동이고, 종속해방운동, 식민지 해방운동으로 나눌 수 있겠다. 독립이라는 명칭 자체에 대해서 고민해보자면 ‘홀로서지 못하는 상대를 강제하는 타자를 전제하는 개념이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애국심이라는 것 하나에만 집착하기에는 독립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관념적인 사상이나 개념이 상당히 넓고 현대인들이 공감하게 만들 수 있는 관념적 사상들은 조금 더 고차원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발표를 들으며 1. 희생정신 / 2. 인간성 회복 / 3. 평안한 삶의 영위 / 4. 민족정체성 회복 / 5. 타자에 대한 항거 등 5가지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역사가 배경인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의 경우에는 문화재학을 기본으로 문화콘텐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So What(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이냐)? ’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역사적 흐름 속에서 파생되어진 독립운동 관련된 부동산, 동산, 무형, 또 경관적인 자원들을 활용해서 경기도 31개 시.군 각각의 문화도시화가 가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명섭 교수님의 남한산성 의병 활동 발표를 들으면서, 이 내용들은 즉각적으로 영상콘텐츠, 캐릭터, 출판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하락 의병부대가 1896년 남한산성으로 거점을 옮기기 전 단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단계로 구분 해 보자면 광주나 음죽, 지평, 안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했고, 이 단계에서는 안성 등지에서는 민승천 이라는 인물이 창의대장으로 있었고, 의병 등을 모집해서 활동을 하면서 그 이후 김하락 부대애에 편입이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의병을 모집하는 1단계가 있었고, 2단계 남한산성 입성전의 광연전투나 노루목 전투들이 있었고, 3단계가 남한산성 입성 후, 4단계 활동무대를 경상도로 이동하는 단계에 대한 총체적 흐름이 잡힌 글이 추후 나온다면, 콘텐츠화에 있어서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 해 사업 중에 남한산성 옛길 타당성 조사가 있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조선옛길을 10대로로 구획을 해 놨다. 그 중 봉화로라는 명칭이 있는데 봉화로가 한양에서 전곡길을 지나서 남한산성을 지난다. 이천, 여주를 거쳐서 영주 봉화까지 태백산 사고로 가는 길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문화자원들이 있겠지만, 옛길을 조사하다 보니 경기도 구간에서 남한산성이 가장 중요한 거점이더라는 것이다.
전근대 자원들에 대한 자료들은 상당히 많은데, 근현대 자원들은 거의 없는 형편인 것 같다. 이 점에 있어서 김명섭 교수님께서 근현대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곳, 역사적 사건이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거점에 대한 코멘트를 해 주시면 좋겠다. 건물이나 동산유물, 터 등 무엇이어도 좋을 듯하다.
추가적으로 이선민 팀장께 질문이 있다. 제가 알기로는 민승천 의병장이 노루목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좀 전 발표에서 ‘패장에게는 창의대장직을 줄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 어떤 사료를 기초로 말씀하신 부분인지 답변 부탁드린다.
좌장 김장환
남한산성 사업에서 거점이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김명섭 박사님께서 말씀해 주시라.
김명섭
지금 말씀하신 부분에 있어서 우선 김하락 의병을 중심으로 연구가 됐고, 그분을 가지고도 충분히 연구를 할 수 있다. 오히려 저는 심지환, 심영택, 신용희, 구연영 이런 분들이 좋은 캐릭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김하락 의병은 서울에서 내려와서 모집을 했다라고 연구가 됐다. 의병은 이미 토착민에서부터 조국적인 분노가 있었고, 동학에서부터 오랜 수탈과 일제와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오랜 분노가 쌓여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심지환, 심영택, 신용희, 구연영 이런 분들이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면서 지역민들이 돌아다니면서 의병연합을 만든 과정도 중요하다. 광주의 구연영 같은 분은 전투에 참여도 했지만 부자가 일제에 저항하면서 두 분 다 순국한 경우이다. 1905년 남한산성 점령 후에도 8년까지 의병전쟁들이 일어난다. 그런 연속성을 고려하고, 그 과정에서의 일제의 만행, 경기도를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으로 포커스를 잡는 것이 경기도 의병에 대해서 제대로 조명하는 것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좌장 김장환
신창희 연구원께서 질문하신 것은 의병활동 관련해서 남한산성에서 거점이 될 수 있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질문하신 것 같다.
김명섭
콘텐츠화의 의견에 대해 말씀 드린 것이다. 질문과 관련해서 타당성 부분을 말씀드리자면, 봉화로는 조병로 교수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봉화에 대한 연구가 이미 나온 것이 있다. 봉화가 남산으로 모이지만 그 전단계가 남한산성이고, 용인은 할미산성을 거친다. 그러면서 이천, 충주 쪽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그러면서 남부 쪽에서는 할미산성이 지역적 거점이 될 것이고, 옛길에서는 남한산성 자체가 광주와 하남을 아우르고 있고, 하남으로서는 청군과 관련한 고궐로 연결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쪽으로는 젯골이라고 하는 골짜기가 우마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큰 길이 있었고 다양한 길이 있다. 남한산성 자체가 광주부윤이 군사적, 행정적, 정치적으로 관청이 있고, 경기지역을 방어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승병도 있는 문화적 종교적으로 번화한 지역이었고, 약 1,400여호가 사는 번화한 지역이었다. 그 지역자체를 복원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좌장 김장환
이선민 팀장님이 민승천 의병장에 대한 질문에 답변 부탁드린다.
이선민
오늘 발표한 내용은 이천을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들의 연구자료에서 발췌를 했다. 2006년에 나온 ‘이천독립운동사’라는 책이고, 김하락이 직접 쓴 ‘진중일기’라는 책을 토대로 정리하신 것 같다. 내용의 한 구절을 인용해드리면 “처음에 모집할 때 고을에서는 이미 창의를 하여 민승천이 대장이 되었으므로 서로 합세하기로 하였다”라고 했는데 그 이후에 이현전투에서 패배를 한다. 이후의 내용에서 패배를 하고 새롭게 김하락이 의병진을 구성을 하면서 박주영을 대장으로 하고 여주에 있던 심상희라는 의병장을 불러서 역할을 드렸다고 재구성을 하는데, “23일 안성에 격문을 보내어 민승천 의장을 불렀더니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아마 이 부분을 보시고 그렇게 기록하신 것 같고, 그 뒤로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데, “24일에 군사수요를 점고한바 포군이 일천팔백명이고, 장수종사관을 합하여 2만명 이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패전한 장수는 다시 등용 할 수 없다. 라고 하여 마침내 박주영을 대장으로 삼고 (박준영, 박주영이라고도 하고 기록마다 차이는 좀 있다) 심상희로 여주대장을 삼고....(이하생략)등으로 새롭게 구성을 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췌해서 사용한 것 같다.
좌장 김장환
그 박주영이 배신한 게 맞나
이선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좀 갈리는데, 김하락은 ‘진중일기’에서 박주영이 살해당했거나 처형 당한거는 사실이기는 한데 배신을 해서라는 것은 이론이 갈리는 부분이 있다.
좌장 김장환
그 부분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셨다. 강대덕 선생님께서 발제하신 ‘경기 동부지역에서 전개된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포천향교의 이종훈 전교님께서 토론을 해 주시겠다.
이종훈
화서학(華西學)의 권위자이신 강대덕 선생님의 발표 잘 들었다. 이 발제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기로는 ‘경기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경기북부 포천, 영평(지금은 포천에 합병), 양주지역 항일의병투쟁활동을 체계적으로 규명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아직도 이 분야가 연구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료를 동원해서 고찰해 좋은 발표한 점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문헌적 가치, 자료를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서 훌륭한 논고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토론자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궁금했던 부분과 발표된 형식에서 의문 나는 점을 질문 드리는 형식으로 보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경기 북부지역이라고 하면 행정구역단위로는 10개 시.군으로 되어있다. 한강북부와 북한강에 위치한 곳인데, 이 중 포천, 영평, 양주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현재는 포천에 합쳐져 존속되지 않는 영평군과 이들 지역을 강조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다.
두 번째 한말에 의병 활동하는 시기를 학자에 따라서 전기. 후기 또는 전, 중후기로 나누는데, 강박사님은 주로 화서학파를 연구하셨기 때문에 을미사변과 단발령 때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셨는데, 논거를 보면 그 부분의 연구발표가 되지 않은 듯한데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셋째. 의병장 허위라는 분이 계신데 1908년 6월 11일, 돈에 현혹된 고향친구의 밀고로 은신처인 경기도 영평군 서면 유동에서 체포되었다고 나와 있는데, 그 때에 대한매일신보는 7월 9일 황성신문은 동년 6월 19일자에 체포된 걸로 나온다. 실제로 판결문은 5월 14일로 되어있다. 왜 이렇게 다르고, 체포되었을 때 누구와 함께 체포되었는지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덜 되어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 부분을 앞으로 보충을 해주셔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좌장 김장환
세 가지 정도 질문하셨다. 경기북부 10여개 중 세 개만 지정하신 이유. 영평은 옛 지명인데 당시의 지명을 사용하신 부분. 화서학파의 입장에서 나뉘는 시기 부분. 허위 의병의 체포시기에 대해서 답변 부탁드린다.
강대덕
첫째는 정리하다보니 범위가 너무 넓었다. 화서 선생님을 43년간 연구하면서 많이 다니면서 했던 것은 한강을 중심으로 하고 북한강 상류에서 능 하나를 넘어 왔다갔다하면서 할 수 있는 화서연원의 유류한 지역으로 잡아야 하겠고, 전기의병은 화서선생님의 영향권 안에서 제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화서연원에서 이루어진 을미의병(전기의병)이라는 부분. 이 명칭은 60갑자에 의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1895년과 6년에 일어난 것인데, 이것을 조도물교수는 1864년부터라고 보고 있다. 안동 향교에서 일어난 것 까지. 그렇다고 한다면 을미의병이라고 하는 60갑자에 의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정확한 연대를 쓰던지, 전. 중. 후기 전환기라고 구분 하는 것이 역사 학회에서 통용화 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다보니 120주년에 맞추려다보니 상당히 열악하고, 간헐적으로는 보이지만 그것을 엮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도 일본측 자료나 이전자료가 있긴 하지만, 일본 측 자료는 일본중심에 의해 쓴 자료를 우리가 비판없이 본다고 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이런 문제가 있고. 세 개의 지역만 한 이유는 경기북부도 세 개의 생활권으로 나눠진다. 고양 파주권, 의정부 양주권, 남양주 구리권. 포천은 양주권으로 묶여있다. 포천 속에는 영평이 지금은 일부 북한으로 분리가 되어 있는데, 그 곳의 자료가 그 당시에는 조선시대에 병합했다가 분리 했다가 1896년에 지방제도 개정 할 때에 분리됐다가 합쳐졌다가 다시 분리가 됐는데 1896년부터 1914년 까지는 (포천과)분리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포천과 영평을 묶어서 보는 게 아니라 영평이 그 당시에는 경기도 38관하를 타이틀로 해 보려고 그렇게 정리를 했다.
두 번째 전기의병 쪽은 양평, 춘천지역. 강원도와 특히 양평, 가평지역은 관찰부로 되어 있을 때 춘천관찰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평, 양근지평은 강원도 생활권으로 묶여 있고, 지금도 가평은 춘천으로 많이 오고 있다. 다음 충주의 경우는 원주가 충주관찰부였다. 그런 면에서 시대적 인식을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시기적인 상황 속에서 전기의병 쪽이 너무 자료가 미미하다. 그리고 포천사람으로서 춘천의병회, 포천, 영평사람으로서 지평의병회, 학문적인 연원으로 인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학문적 연원도 중요하지만, 출토지(출생지)를 중심으로 한 것도 필요하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루지 못했다.
왕산 허위에 대한 부분은, 판결문과 신보들과 다르게 보느냐.
매일 신보 7월 9일자에는 6월 9일로 나왔고, 황성신문 6월 19일자에 6월 12일로 나와있다. 그런데 왜 판결문에만 잘못되어 있느냐.
우리가 판결문을 그대로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서두에 말씀 드렸는데, 그 당시에는 거의 다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근거라던가 배후를 숨기기 위해 다 가려지게 되어있다, 그 이후 대한매일, 황성신문에는 6월 12일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고향친구라고 되어 있는데, 발제문을 쓰고나서 찾아봤더니 권대응선생이 밝혀 놓았더라. 유동에 박정현이라고 하는 사람이 밀고로 알려줬다. 판결문은 가리워진 것도 많고 이름도 여러 가지를 쓰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신문이나 다른 것에 연계된 것으로 보자면 왕산 허위의 순국. 체포는 6월 11일자로 정리가 되어있다.
이종훈
나중 논고에서는 그 상황을 각주를 달아주시기 바란다.
좌장 김장환
이번에는 윤종준 선생님의 남한산성 전쟁에 대해서 홍대한 숙명여대 건축환경디자인연구소 연구원께서 토론해주시겠다.
홍대한
발표해 주신 것에서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해서 이야기 해 보겠다. 일반적으로 오늘 참석자께서는 각 지역을 배경으로 연구하고 계신 분들인데, 미시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모습들이신 것 같다. 상대적으로 저는 ‘경기’라고 하는 측면에서 거시적인 질문들을 해 보겠다.
첫 번째 질문은 윤박사님의 발표문 머리말에서처럼 박은식의 의병의 정의가 있는데, 앞서 고려나 이전에 있어서의 외침과정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전체 한국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병. 일본의 초기 침탈기 이전의 의병들의 성격과, 오늘 포럼에서 다루려는 시간의 제약 속에서의 의병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질문이 모호할 수 있지만, 이것이 결국은 초기 의병들을 명확하게 하는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하는 차원에서 질문을 드려보겠다. 그 이유는 고려 전 기간을 보면 외침의 기간이다. 현종 때 거란이나 몽골전란 때를 보면 향리들이 주도해서 의병을 조직한다거나, 고려 때는 항마군이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승군들이 참여하지만 명분상으로 의를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거시적인 한국사 입장에서 봤을 때 의병들과 초기 침략시기에 활약했었던 의병과의 뚜렷한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
두 번째 질문은 이천문화원 이선민 주임 포함 ‘남한산성의 항일 의병운동’이라고 명칭 할 수 있을 만큼 남한산성에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그만큼 이 시기에 남한산성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가 크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한산성 의병운동이 전. 후와 일제강점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좌절되지만 이후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사에 미쳤던 의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세 번째는 윤박사님의 발표문에서 김하락의 진중일기를 언급하면서 봉기원인을 여섯가지로 제시하고 계시는데 앞선 다른 발표자도 말씀하셨 듯 의병운동이 어떤 지도자를 중심으로 연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보면 의병으로 참가했던 병사라고 해야할지 의병군이라고 해야할지, 실제로 전투를 참여한 부분인데, 사료를 간과할 수 없지만 이들이 지도자급들이 제시했었던 봉기원인 등을 동의할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지도자급들 보다는 교육. 지식수준이 낮기 때문에, ‘의’라는 개념보다는 현실적인 부분. 여섯가지 제기의 기준이 되는 계급, 민족 모순에 동의해서 참가를 했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주’였는지가 알고싶다.
네 번째로는 오늘 주제가 ‘경기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현황’인데, 개별적인, 대부분 남한산성이 핵심이 되고 이들 주변의 경기북부라든가 이천지역 등, 그리고 이들 지역은 결국 남한산성과 연결이 되는데, 이러한 사건들 중심의 현황은 정리된 것이 있는데 이 모두를 아우르는, 거시적 측면에서 과연 경기 의병이라는 관점 속에서 살펴봤던 전체 주제가 어떤 의의를 찾을 수 있는지를 질문 드린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강대덕 소장님께서 언급하셨던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역사연구에서 전기, 중기, 후기의 구분을 사용하고, 조선시대사 같은 경우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이 있는데, 오늘 발표 하셨던 분들. 윤박사님을 보면 선행연구를 통한 시대구분을 언급했다. 최소한 경기지역에서는 항일 의병에 대해서 특수성, 제한성 때문에 연구자들마다 시기차를 달리 둘 수 있지만, 하나의 동의 할 수 있는 도식적이라고도 할지모르지만 시기구분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시기자체가 길지는 않으나 시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쭤본다.
그리고 의병에 있어서 전기, 후기, 을미나 을사 같은 사건중심으로 거병을 한 것인지 아니면 전기에 하던 을미의병이 군사력의 잔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후기의병의 발발에 있어 원인을 제공했는지에 대한 선후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윤종준
의병이라고 하는 박은식 선생의 정의가 ‘민간인으로서 국가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참전한 사람들’이라고 되어있는데, 사실 삼국시대에도 공식적 용어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려시대든 조선시대 때 주로 전쟁 때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삼군체제를 갖춘 적이 없기 때문에 거의 90%이상이 민병이었던 것 같다. 의병의 나라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을 극복 한 것은 거의 의병의 힘이지 관군의 힘은 아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관군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쟁이 터진 직전과 직후의 대비상황에서의 작전단계에서만 이고, 육지전쟁에서는 거의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굳지 그것 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의병이라고 지칭이 되었다. 연산군을 축출하는 중종반정 때 참여했던 자들 스스로를 의병이라고 했고, 광해군을 몰아낼 때 인조가 자기 군대를 의병이라 불렀다. 박은식 선생이 말하는 의병과 뉘앙스가 좀 다르다. 자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조직화된 군대를 이용한 것이다. 정의 군대다는 의미를 가진 경우고, 전쟁을 참가한 의병은 박은식 선생의 의병이라고 의미가 일치되는 것 같다. 한말에 대한제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후의 의병전쟁이기 때문에 구한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시기 의병은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 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박은식 선생의 의병의미에 부합된다고 보고, 물론 밑에 병사로 참전한 의병들이 임진왜란 때와 같은 위기상황에서와 같은 참가의식을 가졌는가? 제 생각에 깊은 연구를 하진 않았지만 시대적 상황(서승갑 선생님의 말씀에도 있듯)에서 주인의 명을 따랐을 가능성. 신분제타파에 따른 가능성, 외세침략에 대한 내 것을 지켜야하는 가능성이 복합적으로 얽힌 것 같다.
성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남상목 같은 경우도 1907년에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이전에 1905년 전후로 수탈을 당한다. 일시적으로 잠깐 구금됐다 풀려나서 정식 의병부대를 조직해서 전투행위로 표출했다. 일반인들이 상당히 원칙적으로는 계층구분이 되었지만 일본수탈에 관해서는 평민들도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같이 참가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런 현상은 3.1운동까지 이어진다. 리더들은 거의 양반출신이고 참가자는 농, 평민과 천민까지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당시까지도 시골 등에서는 동네유지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1904년 하남시 마반식당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났는데 사건 뒷처리 총 지휘를 광주지역의 군수나 이런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집강’이라고 하는 요즘 말로 하면 이장님 같은 사람이 사망원인의 초기 진단이라든지 과정을 총괄지휘를 한 기록이 있다. 만세운동 때까지도 지역의 유지가 나가자고 하면 나가는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답이 충분한지 모르겠다.
약간 겹쳐져있긴 한데 산성의병은 해체되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고, 일부가 의병은 아니더라도 삼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후일 신간회운동까지 이어지는 구조가 남한산성 주변에 나타나있다. 일제가 망할 때까지도 이 지역의 지도자들은 일제 강점기 때 면의 이장이 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제 후에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거의 지역에서는 소외 된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는 거의 소외 된다. 일제 강점기 때 면장 했던 사람에 대한 송덕비 같은 것도 세워지기도 하고, 친일파에 거목이었던 민영위라는 휘문고 설립자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부자세력으로 남아있고 이민도 가고 그랬지만 이런 사람들을 기념하는 비석들은 주민들이 제거해버렸다. 일부는 오히려 송덕비가 세워져 있기도 한 사례들이 있다. 의병에 참가했던 지도자들의 영향력은 순수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한 후손들은 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해는 입지 않는 정도로 정신이 이어졌다라고 판단된다.
다음 경기지역만의 시기구분은 미처 생각 못한 부분이다. 이 행사 준비하면서 강대덕 소장님 말씀 중에 경기지역을 여러 개로 나눌 수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 파주나 고양 쪽을 더 발표하려다가 준비시간이 부족하고 해서 못했다. 경기지역의 시기는 거의 현재의 시기가 서울경기 중심에서 구분된 걸로 판단된다.
오늘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을미의병이 김하락 의병장과 같은 시기에 동시에 다른데서 전개된 것이 흔히 제천의병이라고 알려져 있는 제천의병의 발상지가 경기도 지평현 상동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이다. 거기서 안승우, 이춘영 이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서 제천으로 이동해 가서 제천의병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상태이다.
좌장 김장환
이번에는 이천 이선민 팀장님께서 발표하신 ‘이천의 구한말 항일의병투쟁’에 대해서 이천의 서희리더십사관학교의 대표로 계신 안병문 선생님께서 토론해주시겠다.
안병문
제가 향토사학을 하고 있지만 국문학이 전공이다. 지금은 민속자료 설화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고 지역학에서 전설 설화 민담을 담당하고 있다. 자료를 한 번씩은 읽어봤지만 제가 감히 발표자의 수준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토론자로 나서기가 부끄러웠다. 오늘 참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의미를 규명해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느낀 소감 몇 가지를 질문해보겠다.
20분 동안에 이선민 팀장께서 준비하신 것을 다 제시하지 못하신 것 같다. 김하락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이천 만의 이야기 구연영, 전덕기, 이명순 열사 같은 분들이 이천에 거주하는 사람이면서, 의병활동이 아니라 개혁 운동같은 (노비문서 폐지 등) 혁신적인 활동을 해 나간다. 그 부분에 대해서 뒷부분에 못하신 이야기를 인물별로 1분정도씩 말씀해달라.
처음 서승갑 교수님이 말씀하실 때 ‘의병전쟁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이천의 의병활동에서도 신돌석과 같은 의병장이 나온 사례는 없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이유는 신돌석은 천민인데 의병장이 됐다. 아래 계급의 말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지도자들은 낙향한 유생인 기득권층이었는데, 신돌석의 경우 하층민이 의병장을 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이미 평등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질문을 드렸다. 그 가치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라.
다음은 의병운동에서 과거의 각종 난 때 보면 승려나 신도들, 그리고 한말의 천주교나 개신교 쪽에서도 의병활동을 하지 않았나 저는 생각을 한다. 총칼을 드는 활동은 아니어도 있었다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설명해주시기 바란다.
좌장 김장환
이천에 김하락 의병장 못지않은 이천출신의 의병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부분의 발제를 못하신 부분에 대해 추가 발제를 요청 하셨다. 이천에도 천민출신의 신돌석 의병장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질문을 드렸다고 본다. 저도 궁금한데 종교계 쪽에서도 이런 의병 활동을 했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란다.
이선민
앞서 발표해 주신 분들과 달리 저는 한참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을 다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되는 구연영 의사의 활동과정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 질문과 세 번째 질문인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다른 단체에서 했었던 항일 투쟁이 있는지를 같이 대답 드리겠다.
김하락 의병장이 남한산성에서 밀려서 남쪽 지역으로 부대이동을 감행한다. 중간에 예천에서 처음으로 다섯 명의 동지 중에 탈락(따로 떨어지는)되는 분이 생기게 된다. 유인석의병장한테 감화 받아서 그의 제자가 된 김태원이 있고, 또 경주에서 또 한 명 이탈자가 생기는데 그게 구연영이다. 이분의 경우 탈락하는 과정을 진중일기에는 못되게 써놨는데, ‘구연영이 겁을 먹어서 돌아왔다’라고 써 있지만 제 생각에는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까 의병체계에 대해서 말씀 하셨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이 중군장 역할인데, 이천창의소에 중군장을 맡았던 인물이 구연영이다. 그래서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광현전투, 이현전투, 수백 명이 죽어나간 남한산성 전투에서도 끝까지 투쟁했던 분인데, 이 분이 경주의 비봉산 전투에서 약간 위기에 처했다고 겁을 먹고 돌아왔다는 것은 설득력이 좀 부족하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의병항쟁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차로 회군을 한다. 그때부터는 의병항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교가 있는데 기독교에 몸을 담으면서 일종의 애국계몽운동을 하게 된다. 구국회활동이라고 해서 이천의 항일의병사에서 중요한 활동이다.
1907년을 기점으로 일진회라는 활동이 있는데 여러 장터에서 사람을 모아서 군중집회를 하는 것이다. 일진회의 부당함이나 지금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성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일진회의 밀고로 구연영과 아들인 구정서 부자가 잡혀서 총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풀이하면 기독교의 항일운동이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고, 천주교나 불교도 말씀 하셨는데 이 부분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천에 부악산 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설봉산이다. 초창기에 설봉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많이 일어났었는데 그때 직접적으로 영월암에서 풍류를 했다 등의 어떤 기록은 없지만 이전에 1907년도에 멕켄지 기자라는 외국 기자가 서울중앙에 있다가 의병활동이 지방에서도 격렬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등의 이야기만 듣다가 눈으로 봐야겠다고 해서 물어보니까 의병은 다 경기도 이천에 있다고 해서 갔는데 보는 풍경이 전부 마을이 불타버리고 동리자체가 모두 폐허가 됐다. 그리고 그때 일어났던 것이 이천 총화사건이라고 이천의 약 1,000여 가구가 불탄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설봉산에 있는 영월암도 모두 전소된다. 일본군들이 아무 이유 없이 불태우지 않았을꺼란 생각은 든다. 전에도 사찰 중심으로 의병들이 활동하고 보급받은 사례가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영월암도 그런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 저의 추론이다. 밝혀진 것은 없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경기 의병과 관련한 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제가 들은 바가 없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드리기가 어렵다.
좌장 김장환
마지막으로 서승갑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의병항전의 역사적 의의와 기념사업 방안에 대해서 최영주 경기도문화원연합회 사무처장님께서 토론해 주시겠다.
최영주
작년에 경기학연구센터 쪽에 ‘경기의병전’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작년부터 문화원을 중심으로 ‘미래유물전’이라는 전시를 했다. 기존 유물이라는 과거를 어떻게 미래로 가져갈 것이냐고 했을 때, 결국 현재 지역을 문화원이 어떻게 재구성 할 것이냐 라는 콘셉트였다.
<미래유물전> 이후 문화원이 가지고 있는 이전 자료들을 다시 재구성해서 눈에 보여 지는 형태, 즉 전시라는 형태로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역 뿐 아니라 역사를 재구성해서 현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것을 눈에 보이는 사업의 형태로 어떻게 만들어야 될 것인가? 라는 의미로 제안한 것이 <경기의병전>이었다. 그때 경기학연구센터장께서 ‘의병연구는 너무 방대해서 하나로 맥락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라는 답변을 받았었는데, 오늘 포럼을 하면서 일정 부분 의병을 통한 역사의 재구성과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무엇인가 가능할 것 같다! 라는 희망을 본 것 같다.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잘 몰라서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지만, 이런 포럼을 통해서 그 다음단계는 뭘 하지? 라는 질문을 해 보고 싶었다. 얘기로만 끝나질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서승갑 교수님의 발제를 듣고 ‘의병’이라는 개념을 애국심에 의한 것이다! 는 관점만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의병 운동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동시 해결을 지향했다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의병들이 어떻게 구현했는가! 하는 부분. 그 당시 시대정신의 맥락으로 의병 정신을 어떻게 재해석해야 될 것인가 하는 중요한 연구과제가 도출된 것 같다고 느낀다. 정신사적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구성체 변화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어떻게 조명해야 될 것 인가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서승갑 교수님의 경우 가장 먼저 다음 단계에 이것을 연구했으면 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 해 주시기 바란다.
또 하나는 향후 실천 사업에 있어서 사업이 구체화 된다고 했을 때 이 포럼을 통해서 제안 해 주실 게 있으면 말씀 해 주시길 바란다.
사실 저는 사업기획을 할 때 토론회나 포럼에서 어떤 교수님이 사업제안을 했다라고 하면 힘을 좀 받는다. 현실적이고 실천 가능한 제안들을 듣고 싶다.
서승갑 실제로 대학에서 강의를 해보면 학생들이 세 명정도만 듣고 나머지는 잔다. 역사학자들도 반성해야한다. 여기 계신 분들은 엄밀히 얘기하면 문화의 전달자이다. 전달자들이 이렇게 재미없는 토론을 장시간 해서 뭘 얻는 건지. 프랑스 아널학파가 포도주 생산과 관련해서 날씨를 가지고 연구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해석한다.
김하락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문화콘텐츠에 관심이 있다고 하시니까 제가 김하락 강의 할 때는 어디서 싸우고 어떻게 했다라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김하락 사진을 놓고 관상학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 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하락은 한국 전형의 무장형이다. 초, 중, 말년 운으로 나눠서 설명해주면 한명도 졸지 않는다.
오늘 포럼은 전공자끼리 하는 이야기지 이렇게 재미없는 얘기를 들을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명도 없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바쁜 시간에 모여서 아무 이익도 없는 얘기를 왜 듣겠는가? 제 생각에는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해석방법 보다는 실생활에서 요구되는 것들이 필요하다. 의병장들이 관상학 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만 봐도 후기의병장들과 달라진다. 전기 의병장들은 상당히 세련된 모습을 보이지만. 뒤로 가면 이인영 같은 경우 관상학적으로도 왜 장군으로 불렸을지 알 정도로 얼굴에 나타난다. 관상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공부하면서 왜 중국 사람들이 인물에 대해 얘기하고 눈, 귀를 설명하고 인상을 어떻게 파악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도 역사를 공부하고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려면 기획전시이라든지 하는 부분이 지금까지의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본다. 엉뚱하고 의병과 관련 없는, 예를 들면 의병의 옷을 소재로 한다는 등. 전기의병과 후기의병의 의상이 왜 달라지는지. 실제로 한국이 모자의 나라인데, 프랑스에서 한국의 모자가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기술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이 됐다. 후기의병에는 다양한 의상이 나타나는데 그 것은 계급이 다양하다는 거다. 역사만 가지고는 안되고 설화, 건축학, 의상학 등에 대한 연구발표도 같이 이루어져야 의병이야기가 아닌데 들어보니 의병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 될 수 있다. 주변을 이야기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제안이다. 문화가 우리와 인접한 데에서부터 착상이 되서 다른 시각으로 봐 나가는, 그 시대 사람들은 무슨 고민을 했고 생각은 어떻고 의상은 어떻고 등으로 접근해야한다.
신돌석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천에는 과연 신돌석 같이 생긴 사람이 없었을까?
여기 모인 분들이 누군가 의병 나가자라고 한다고 나가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왜 나갔을까? 인간적 유대관계에서 신뢰와 실천을 보여줬기 때문에 존경심이 실천으로 옮겨졌다는 거다. 왜 패장과 명장이 있는지. 명장은 구성원의 마음을 사는 것인데, 단순히 나가서 싸우고 학문적으로만 연구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지역사회에 장이 됐는데 그 장이 상당부분 구성원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믿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전체가 동의하고 전체가 따라가는 사회구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다양한 부분을 조망해 낼 수 있는데 우리는 의병. 자료만가지고 이야기 하니까 모든게 막혀있어서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이 강인한 민족이다.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이 뛰어난 전술. 전략 등 모든 것들이 제일 어려운 시기에 자기의 생 보다는 다른 것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했던 것을 다시 봐야 한다. 의병장 중심으로 봐서는 안된다.
부탁드리는건 주변지역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사업구상이 필요하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각 전문 분야에서 한 주제를 놓고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포럼이 필요하다. 융합하는 사업구상이 필요하다.
좌장 김장환
토론회를 정리 해 주신 것 같습니다. 고정관념. 발상의 전환을 해야한다는 말씀인 것 같다. 이제 지정토론은 마쳤다.
이명수
지금까지 토론한 것을 보면 의병에 대한 하나의 평가라고 할까? 앞으로 최영주 처장님께서 이런 자리를 한 번 더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동두천시사 30년을 집필하다 보니까 의병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안되어 있다. 의병항쟁 재판기록에 올라가 있고, 재판기록이 폭도, 수괴, 사기, 강도라고 되어있다. 문제는 그분들의 공적을 찾기 위해서 과천 국사편찬위, 천안 독립기념관 다니면서 판결문 자료를 다 찾아봤는데, 의병에 대한 기록은 반쪽, 많아도 한쪽 밖에 없다.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국가보훈처에 가보면 자세가 틀려먹었다. 일제 잔재들이 거기에 앉아 있다. 국가보훈처직원들이 왜 있나? 그들이 지방에 다니면서 묻히고 잊혀진 의병들을 발견해서 의병들을 국가유공자로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자료수집해서 갖다 주면 검토하고 더 해오라고 시킨다. 국가 보훈처가 진품명품 가리는 곳인가? 앞으로는 토론회가 그분들의 명예회복에 힘써야 한다. 예를 들어 동두천에 정용대, 부아인, 이금례 의병이 있고, 또 한 번은 홍원우, 부아인, 이금례 의병이 있다. 이분들이 국가유공자가 안되어있다. 하물며 정용대, 부아인, 우병창 의병은 고순주 사위가 노무현대통령시절에 청와대 근무하신 분인데도 그걸 못했다. 제가 되려 그분들의 공적을 가지고 국가보훈처에 가서 설득을 해야된다는 거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하면 자기 생계를 위해서 의병을 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한다. 예를 들면 우병찬 의병이 자기 동료인 하봉조 의병이 그 당시에 의병활동을 하다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아버지를 찾아가서 의병이 친구의 아버지니까 당신 아들을 빼줄테니 얼마를 내놓으시오 하니까 사기죄로 올라가있다. 그러니까 청와대에 해명을 못한거다. 사기를 쳤던 강도를 했던 간에 과정이 중요하게 아니라 군자금이 어디로 쓰였는지가 중요하다. 당시는 러시아 중국 만주에서 무기를 팔고 사는 밀매꾼들이, 일제 앞잡이를 모두 조선사람이 했다. 그럼 순순히 돈을 낼까? 이분은 찾아갔는데 아는 사람을 통해서 빼줄테니 돈을 달라고 한거다. 이런 부분을 자기 생계를 위해서 했다고 말하는 거다. 그 돈이 군자금이 들어간 거다. 분명 그 사람의병장이 홍원우이고 군자금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이 자기 직책을 사칭해서 그 돈을 가족을 먹여 살렸다면 일본이 누군데 정말 그랬다면 일본측에 의병이라고 올라가 있지 않았을 거다. 일본 헌병들이 얘기할 이야기를 국가보훈처 직원이 하고 있다. 이건 아니다. 여하불문하고 의병항쟁 재판기록에 올라가 있는 의병은 독립유공자 시켜달라고 말했다. 동두천에 보면 자락에 독립유공자추모비가 있다. 1987년에 세웠는데, 독립유공자는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다. 기념비를 세우면 건립비를 세운다. 어느 단체, 개인에 의해 왜 세워졌는가가 있다. 시장 이하 세운 사람들이... 그 다음에 독립운동 활동사진도 들어가 있고, 마지막에 독립유공자 명단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부분에 또 시장. 시의회 등등의 이름이 또 들어가 있다. 그런데 TV에도 제보를 해서 방영을 했는데도 아직도 안고쳐져 있다.
좌장 김장환
긴 시간동안 진지한 발표와 토론 하시면서 경기의병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좋은 시간이 된 것 같다. 저는 용인지역밖에 몰라서 오늘 포럼을 통해서 제가 단편적인 것만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지역학협의회 4차 포럼인데, 의병포럼이 올봄부터 이야기 됐었다. 여건이 안되어 못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시행하다보니 단시간에 준비하느라 미흡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 내년에는 준비도 철저히 해서 다시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