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영 직 문학평론가
어르신문화프로그램을 문화원이나 다른 단체에서 진행하고 계신데, 어르신문화프로그램의 본질은 무엇일까? 핵심은 ‘이야기’라고 본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이냐?를 끌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현장을 보면 활동가사업이든 기획자사업이든 컨텐츠사업이든 일자리 사업이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고, 많은 경우 몇 년 째 하고 있는데 대부분 동어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운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특히 외부에서 보면 더 쉽게 보인다. 자폐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어르신문화프로그램이 당면한 문제점 인 것 같다. 이걸 어떻게 전환해야할지 고민인 것 같다. 지금의 프로그램 진행은 대체로 기능강습위주의 프로그램이다. 나쁜건 아니지만 기능강습만 하는 것이 문제다. 경기도문화원연합회에서 2016년도 기획자교류를 기획할 때 현장이 왜 이렇게 안바뀔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기획자 뿐 아니라 강사가 변화할 필요가 있다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결국 강사들이 바뀌어야한다. 노인, 노년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고, 교육의 질은 강사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데 이런 부분을 이야기 하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참여하는 어르신 뿐 아니라 선생님 한분한분에게도 해당된다.
이런 질문을 드린다. 문화원, 문화시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에 ‘내가 노인이라면 참여 할 수 있을까?’
근자감이 무엇인지 아는가?
저는 근자감을 근육, 자신감, 감수성으로 바꿨다. 몸과 마음과 감수성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대흠이라는 시인의 아름다운 위반이라는 시를 읽어보겠다. 버스기사와 노인과의 이야기를 쓴 시인데, 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다.
아름다운 위반 이대흠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디
첫째 연에서 핑퐁하듯이 대사가 펼쳐져 있다. 시골 간이 버스에서 버스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시골어르신이 세워달라고 하는 내용이다. 물팍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는가? 무릎이라는 뜻이다. 이 시의 의미는 두 번째 연이다.
‘노인네가 갈수록 ~~~~~’ 마치 버스기사가 혼자말 하듯이 되어 있는데, 지난번에도 모셔다 드렸고 지금도 모셔다 드렸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 시의 두 번째 화자가 어르신문화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획자나 강사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물팍이 애린 어르신은 버스정류장에 내렸을까? 이 시의 제목은 ‘아름다운 위반’이다. 이 부분이 어르신문화프로그램의 마음의 스탠스(stance)이다. 이것이 과연 현장에서 잘 되고 있는가? 어떤 면에서는 어르신을 프로그램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를 이야기 하고 싶다.
올해 7월에 읽은 소설인데 프랑스소설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라는 노인작가의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메르타할머니인데 노인요양소에 거주하는 전직 체육교사 출신의 79세 할머니이다. 이분이 요양소생활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다보니 감옥에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양소의 은방울꽃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노인강도단을 결성해 박물관의 그림을 훔치고, 은행도 털고 하면서 외국으로 도망을 친다. 노인요양소의 생활이라고 하는게 전부다 의존하는 삶을 산다. 그런 것에 대한 의미인데 어르신문화프로그램에서의 중요한 것이 ‘의미’라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의 과정, 설계 모든 것에서 어르신들이 주도성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한데, 많은 경우 강사가 끌고 가는대로 움직인다. 하물며 어떤 강사는 원장이 몇 번 바뀌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고 한 강사가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하나도 현장은 바뀌지 않는 경우도 있다. 기획자 탓만 할 수도 없는 것이 대부분 문화원의 직원이 2.5명밖에 안된다. 온갖 접시를 돌려야(일을 다 해야)하니 하나에 집중 할 수 없어서 때로는 접시가 한 두 개씩 깨지기도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메르타할머니가 앞부분에서 하는 얘기는 상당한 메시지를 갖는다. 전직 체육교사였고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상당한 활동을 했던 분이다. 그런 분이 “여기 요양소에 들어온 이후로는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변해버렸을까? 여기서도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한다. 실제로 소설을 쓴 할머니 작가분이 요양소를 다니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노인을 폄하하고 경멸시하는 사회문화에 대해서 꼬집으려고 쓴 작품인 것 같다. 이 소설을 어르신문화프로그램에 접목해 본다면, 단순히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참여하는 어르신들과 주도성을 공유할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하는게 필요한 것 같다. 어린이들도 주도성을 가졌을 때 존재감을 가지고 보람을 찾게 되는 것처럼 프로그램 전반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가 중요하다. 특히 동아리 활동가사업 뿐 아니라 컨텐츠나 일자리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당신의 이야기. 이야기라는 부분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가 필요하다. 조나션 갓셜(Jonathan Gottschall)은 인간은 호모픽투스(Homofictus: 이야기하는 인간)라는 말을 한다. 문화예술의 본질은 이야기이다. <스토리텔링 에니멀>이라는 책도 썼는데, 음악이나 장르화된 기능강습으로 왜 빠질까? 이것은 매개일 뿐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 내야 한다. 매마수에서 오카리나하는 어르신들이 공연을 하는데 그걸로 끝이다. 그 다섯명의 어르신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과거의 삶에서 어떤 이유로 이 악기를 하게 됐는지의 이야기가 있을 때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게 되는데,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 이외의 것은 없다. 한사람한사람의 개별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개별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노인일반이라는 덩어리가 아니라 한사람한사람의 특이성(singularity)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 갓셜의 이야기를 보면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식량과 인간공동체’라고 한다. 인간 본질적인생존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간다라는 말이다.
(사진)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시에 폭탄을 던져서 홀랜드하우스라는 도서관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이 서가에 있는 책을 가져가는 사진이 있다. 책을 왜 가져가는 것일까? 사람은 아무리 가혹한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찾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는다. 그건 나는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싶은가, 일부이고 싶은가를 찾게 된다는 거다.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이다. 프로그램 종료 후 어떤 이야기를 그 안에서 찾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단적으로 볼프랑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라는 작가가 쓴 짧은 소설엔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라는 소설이 있다. 9살 위겐이라는 아이가 폭격으로 무너져버린 잔해 앞에서 쭈그리고 울고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왜 울고있느냐고 묻자 건물더미 밑에 부모님이 들어가 있는데, 쥐들이 파먹을까봐 지키고 있다라고 했다. 아저씨가 말하기를 “위겐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은 안하시던? 쥐들도 밤에는 잠을 잔단다.“ 과학적인 사실과 무관하지만 그 말에 아이는 자기의 고통스러움 속에서 세상을 향해 한발짝 나아갈 힘을 얻는다. 참여어르신들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써나가기를 원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기획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을 어르신 덩어리가 아닌 개별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야기는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시 한편을 읽어보자.
점심 비빔밥 | 허수경
교실에는 작은 석유난로가 있었다. 겨울이면 그 난로 옆에 도시락을 두었다. 아침에 도시락을 그렇게 난로 곁에 두면 양은 도시락 속에 든 밥은 학교까지 오느라 찬바람을 맞고도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사학년 땐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도시락 반찬으로 아이들 집안의 빈부가 가늠질되는 게 보기 좋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밥하고 가져온 반찬하고 큰 양동이에 부어 같이 비벼 먹자.” 모두 도시락을 내어놓았고 가지고 온 반찬도 함께 양동이에 부었다. 비벼서 서로 나누어 먹었다. 비빔밥을 먹다보면 선생님 생각이 난다. 굶는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 다섯 개를 가져오셔서는 양동이에 붓던 처녀 선생님.
시에 등장하는 처녀선생님이라고 표현되는 대상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발상은 천박하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의미로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사람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꾸준한 공부가 필요하다.
노년에 관한 다양한 문화적인 텍스트를 눈여겨 보시면서 어떻게 내가 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관련이 되는지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도 일상에서의 공부법이다.
브라질에 꾸리찌바라는 도시가 있다. 박용남의 <꿈의 도시 꾸리찌바>라는 책이 있는데, 이 도시에서 운영하는 수업의 타자연습 교재에 이런 시가 있다고 한다.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나는 당신과 함께 울어줄 수 있다.
당신이 웃고 싶다고 느낄 때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우리는 함께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필요치 않을 때도 역시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나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
독수리타법으로 타자를 치는 동안 이 시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겠다는 메시지를 잘 설명해 준다.
결국 사람은 다양한 것이다.
올해 화재가 된 책 중 이스라엘 작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이 있다. 내용은 대체로 공감하지만 16세기 이후 지금까지 역사를 백인남성의 시각으로 서술한 부분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이를테면 신석기 시대를 빅히스토리라는 관점에서 쓴 부분은 상당히 공감이 된다. 만년전 쯤 인구폭발이 일어났다. 하라리는 책에서 ‘우리는 밀을 경작했다 라고 하지만, 사실은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라고 바라본다. 그런 부분은 새로운 시각인데, 그 무렵 문화가 발생했다는 얘기를 많은 인류학자들이 정의한다. 흔히 문화의 발생이론을 얘기 할 때 ‘할머니 가설’을 말한다. 그 시대의 할머니들은 일종의 잉여 인간들이다. 잉여인간이 된 할머니들은 자기 손주만 돌본 것이 아니라 옆집아이까지 함께 돌보면서 문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할머니들한테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특히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들한테 농촌과는 다르게 그런 부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에 할머니들이 쓴 시들이 꽤 나왔다. 충북 옥천 안내면에 어머니학교라는 곳이 있다. 여기는 졸업이 없다. 입학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죽어야 졸업이 가능하다. 모든 것을 자치로 운영하고, 프로그램도 강사주도가 아니라 참여한 할머니들이 회의를 해서 배우고 싶은 것을 결정하면 강사모집을 한다. 문화원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작년에 안양문화원 현장모니터링을 갔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이 기존 강사를 다 정리하고 새로운 젊은 강사를 영입해서 변화가 생겼다. 오래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머니학교의 형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경기문화재단의 웹페이지 지지봄봄에 보면 옥천신문의 권단이라는 기자가 어머니학교에 대해 상세하게 취재를 해 놓았다. 참고하시라. 결국은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한다. 일개 문화시설에서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정책사업의 설계자체를 고쳐야 할 필요도 있다. 인간을 기능적으로 파악하는 부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이 시에 보면 시를 잘 쓴 것은 없지만 지역과의 연계, 마음속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데서는 주목할 만하다.
경북 칠곡에서 작년에 <시가뭐고>라는 시집을 냈다. 6-7년 동안 한글교실에서 한글을 배우신 어르신들이 쓴 시 몇백편 중 100편을 선정해서 시집을 냈다. 그 중 몇 편을 보겠다.
시가 뭐고 | 소화자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
시를 쓰라 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아름다운 위반에서는 전라도사투리의 힘을 맛봤다면, 이 시에서는 경상도의 힘을 본다. 이런 시집이 일반적인 문해교실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결국은 주도성이 중요한 것 같다.
올 해도 시집을 또 한권 냈는데 주민강사들이 30명이 되된다. 작년에 시집이 인기를 끌어서 그런지 이 분들이 좋은시, 아름다운 시, 예쁘게 쓴 시를 요구하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삶의 지혜들이 시에서 빠지게 된 것 같다.
올해 나온 시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시를 하나 더 소개하겠다.
내 기분
이웃집 할망구가
‘가방들고 학교간다’ 놀린다
지는 이름을 못쓰면서
나는 이름도 쓸줄알구
버스도 안물어보구 탄다
이 기분
니는 모르제
친한 친구인 할머니를 디스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시가 잘 쓴거라고 생각한다. 할머니의 경험치들이 들어 있는 것인데, 기존 시인들의 시를 흉내 내려고 한 예쁜 시를 만들려고 하는 것. 지금의 문제가 그것이다. 어르신문화프로그램에서도 강사들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싶다. 강사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그램의 변화는 쉽지 않다.
로마노 과르디니 (Romano Guardini)라는 독일 신부는 나치 체제에 저항하면서 쓴 책에서,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위험은 바로 생이 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생’이라는 것은 인생. 즉 평범한 인간이다. 세속화 된 인간이란 뜻인데, 니체가 최근에 쓴 말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의 가장 큰 적은 상투성이다. 이 상투성이 우리의 기획 과정에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김천문화의집에 가면 1070합창단이 있다. 10대 아이들과 70대 어르신들이 함께하는 합창단을 꾸렸다. 어르신 문화프로그램의 가장 큰 문제는 세대간 통합의 고려가 전혀 없고, 그들만의 문화로 취급되고 있고, 젊은 세대들과의 소통이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는 형태다. 이건 위험한 일이고 깨야하는 일이다. 김천문화의집에서 10대 아이들을 할머니들이 엄청 구박했다고 한다. 떠들 권리와 의무가 있는 아이들을 할머니들은 견디기 힘들어 했는데 나중에는 크게 달라지고 서로 이해하는 곡절들을 겪으며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도 하고 있는데 어르신사업의 구조에서 시도하기는 어렵지만, 지역과의 연계차원에서 단순하게 자기의 준비된 과정만 보여주는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과정을 들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동대문문화원의 왕언니 밴드의 경우는 많이 알려졌습니다만, 할머니들이 세대별로 공연 레퍼토리를 준비하는 것은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또 서울극단에서 영자의 칠순잔치라는 연극공연이 큰 화제가 됐는데, 하이서울에서 폐막전으로 공연되었다.
같이 준비하고 사연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공동의 문화적인 목표를 향해서 지역과 연결되고 그 안에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포함 시킬까의 차원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근 경기도 부천에 카툰캠퍼스라는 단체의 도움으로 진행된 시니어 만화창작학교는 어르신들이 만화로 자서전을 쓰는 프로그램이다. 결국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상투화된 것들이 불가피 할 수 있겠지만,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당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마을에서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 누군가가 들어주는 선순환적인 구조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어떤가?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의 고민이 필요하다.
몇 권의 책을 소개하겠다. 기획자들이 읽으면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되어 추천한다.
로마노 과르디니 (Romano Guardini)라는 독일 신부의 <삶과 나이>라는 강연록이다.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 중년, 노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령별로 각 세대에는 인생의 목표가 있고 인생의 목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노년편에 보면, ‘노년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젊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달라진다‘라고 했다. 노년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기획이라든가 프로그램 진행에서 상당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어떻게 어르신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고, 하고 싶어 하고, 어떻게 하는게 가장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좋은 기획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주도성이다. 참여하는 기획자와 강사의 변화를 위해서는 수업비평이 필요하다. 단순 모니터링이 아닌 수업비평으로 질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교육의 질은 강사의 질을 절대로 넘지 못한다고 서두에서 말했다. 그 점을 우리가 고민 할 필요가 있다. 교육의 본질은 티칭의 관점이 아니라 러닝의 관점이다. 그래야 참여하는 수강생의 변화를 끌어 낼 수 있다. 단위 문화시설에서 모두 감당하기 힘든 것을 안다. 특히 인력의 부족은 크다. 그런 두려움은 있지만 담대하게 일상에서의 작은 변화를 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현장의 변화는 기획자교류워크숍에 참여한 강사들이 오셔야 할 것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은 조금이라도 변할 수는 있다. 작지만 조금 달라지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변화가 현장의 변화로 이어 질 것이다.
강사
선생님들 한분한분이 이 안에 있는 봉투를 꺼내시면 어떤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것이다.
5분정도의 시간을 드릴테니 읽어보시고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의 발표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겠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 | 권정생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재미있었고, 인간의 본능적인 생각이 보였다. 1-2학년의 어릴때의 생각은 단순하고 원초적이다. 도모꼬는 이기적인 아이라는 성향이 느껴지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고 계신 이 분도 내공을 참 못 쌓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일 하나에 어르신들도 참 예민하신데 그런 부분을 털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사
이 시의 맨 마지막에 반전이 있다. 실제로 이가 갈려서 그런 표현을 썼을까? 제목으로 유추해 보면 도모꼬라는 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어르신문화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르신 또한 인생에서 마주친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과정에서 어떻게 끌어내고 감정을 그대로 표현 할 수 있게 만드는 자리를 깔아줄까? 하는 차원의 고민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자기의 경험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장화홍련전의 경우라면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빗대어 자기의 삶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짤레꽃은 피고,
또 지고.
처음에는 시가 어려웠는데, 어르신을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처음 어르신을 만났을 때의 첫사랑 같은 느낌이었다. 부모님 같은 느낌이어서 정성을 다하면 부모님께 못했던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3년을 하다 보니 그 분들이 제 속을 너무 많이 썩혔다. 특히 올해가 가장 힘들었다. 어르신들이 보기 싫어졌다. 지난주에 어르신 한 분이 단체 톡방에 칭찬을 많이 해달라고 하셨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분들이었는데 나를 힘들게 했던 것만 생각하고 있었더라. 그런데 이 분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글을 보면서 모든 어르신들이 소중했었나 생각하고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어르신들에게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사
신경림 시인은 83세이다. 이분이 80세가 되던 해에 내신 <사진관집2층>이라는 시집에 있는 글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고, 에로스가 있다. 참여하신 어르신 한분 한분이 인생에 이런 드라마가 다 있고, 강하게 표출되는 분일수록 약한 부분이 있다는걸 알게 해 준다.
[산문] 내가 만약에 | 안도현
내가 만약에 열여덟 살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깨에 닿도록 머리를 기르리라. 축구를 할 때는 출렁거리는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질끈 묶어보기도 하리라.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게 무엇인지 어머니께 분명하게 말씀드리리라. 책상 앞에 앉아 식물도감을 펼치기보다는 들길을 걸으며 허리 낮춰 들꽃들을 보리라. 마음을 흔드는 여자아이를 만나면 내가 먼저 말을 건네보리라. 그 아이의 반짝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리라.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한번 만져봐도 되냐고 물으리라. 귀뺨을 맞더라도 용기를 내보리라.
내가 만약에 열여덟 살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버지가 읽는 신문을 매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리라. 혼자 높은 데로 날아오르기 위해 공부하지 않고 여럿이 낮은 데를 살피기 위해 공부하리라. 밥상 앞에서는 고기를 덜 먹고 채소를 더 먹으리라.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이유 없이 가출을 해보리라. 기차를 타고 가다가 허름한 역 대합실 의자에 누워 날을 새워 보리라. 새벽을 데리고 오는 첫 기차를 타리라. 휴전선으로 막힌 한반도가 서글픈 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뱅글뱅글 돌아다녀보리라.
내가 만약에 열여덟 살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최신 휴대폰이 없다고 안달복달하지 않으리라. 자전거를 타고 공중전화가 있는 곳을 찾아가리라. 목덜미에 땀이 흐를 때까지 친구네 집을 향해 뛰어가리라. 숨 가쁘게 떨리고 설레는 시간들이 나의 편이므로 울고 싶을 때는 크게 울리라.
우리가 살아오면서 사회적역할, 위치, 성 때문에 하지 못한 일들, 평상시에는 하지 못했던 용기가 필요한 일을 과거로 돌아가면 해보고싶다는 내용이다. 우리도 가끔 몇 살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들을 받곤 한다. 내 경우에는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이 나이 까지 자신감 있게 살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기시기 마다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마음에 드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적극적으로 살았다. 만약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과거로 돌아가기 보다는 앞으로 나에게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대비하고 현명하게 살고 싶다. 어르신과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은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 하셨다. 우리가 보기에 노화라는 것은 아픈 것도 아니지만 아름답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은 단어인데도 불구하고 어르신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알았고, 공감 했다. 내가 무슨 일을 잘 할 수는 없더라도 긍정적으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사
안도현의 <발견>이라는 책에 수록된 글이다. 읽었을 때 제 왼쪽가슴에 있는 16세를 끄집어냈던 기억이 있다. 세월호 사건에 희생된 아이들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꼭 그렇게만 읽지 않아도 어르신들에게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을 환기시키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해서 골라봤다.
노인이 되는 방법 | 안주철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 식탐 때문에
혼자 밤늦게 산책을 해도 두렵지 않다.
미인이 쓰러져 뒹구는 술집 근처에 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사람도 없고
애써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도 심심하다. 친구는
사라진 일자리에 빠져 있고 나는
옆 테이블에 앉은 미인의 다리가 궁금해서
아내와 통화를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인이라도
생겼다면 거짓말이라도 정성스럽게 할 텐데.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진을 몇 장 찍으며 나를 속인다.
혼자 밥을 먹으면 눈물이 난다. 식욕이 없어서
혼자 산책을 하면 외롭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서
혼자 영화를 보면 구석에 가서 울고 싶다.
등이 갈라지면서 또 하나의 내가 기어나와
갈라진 등을 두드리며 나를 위로해줄 것 같아서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년의 외로움이 절절하다. 개인적으로 어릴적부터 일찌감치 애늙은이가 되었었고, 중년이 되었고, 벌써 노년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이 기분을 너무너무 잘 알 것 같다. 저도 간과한 것이 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살았나 하는 것이다. 노인은 한 세대를 열정적으로 살았을 뿐이지 이제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치부한다. 그렇게 치부하는 자체가 너무너무 끔찍한 외로움이다. 젊은 세대가 앞날에 대한 기대가 있다면 어르신들은 젊은날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 시에서 마지막연이 가장 인상 깊다. 어르신들은 삶이 가득 느껴지는 감동을 그리워하고 있고, 여전히 멈출 수 있는 이상향을 갖고 있다.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성숙하지만 성숙함 안에 외로움과 권태와 자유가 동시에 있다. 그런데 이런점을 젊은 사람들이 간과한다는 것이다. 내가 80, 90이 되어도 나는 한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이상향을 영원히 희구하는 존재로서 이해해야지 다 살았으니까 그만해도 되고, 아무것도 안해도 되고 젊은사람들이 다 한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르신들은 진부하다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그런 편견을 어떻게 깨야 할것인지를 날마다 생각하고 반성하고 공부하면서 늙어가고 있다.
강사
안주철 시인의 <다음 생에 할 일들> 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였다. 가난을 알고 외로움을 헤아릴 줄 아는 시인인 것 같다. 시에 녹아있는 내용을 시보다 더 의미 있게 해석 해 주셨다. 최근 NHK방송사에서 낸 책 중 <노후파산>이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의 노후 역시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이를테면 제도의 사각지대가 있다. 사회복지가 집이 있거나 예금이 있으면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는데 일본에만도 300만명이 된다. 예금제로가 되는 상태를 매우 두려워하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과는 좀 다를 수 있지만 NHK 기자가 쓴 글을 보면 ‘지금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지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외로움을 견뎌 낼 수 있는 말벗, 즉 연결을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가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한다. 여기 노인복지관에서 오신 분들도 계실텐데 어쩌면 어르신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문화원에서 오신 분들과 노인복지관에서 오신 분들이 또 다를 것이다. 문화원에 참여하는 어르신은 생활이 많이 힘든 분들은 아닌데 노인복지관은 그런 경우도 꽤 있다. 이런 노인에 관한 시각의 문제를 안주철 시인의 시에 빗대어 보았다.
멋진 해설 감사드린다.
이레 속고 저레 속고 | 이분란 (경북 칠곡 할매)
어런 시저레 초등학교 3학년예
아버님 살든 집을 다시 짓타가
다처서 병원에 수술을 받게 댓다
병원생활 일년을 하다보니
엄마가 하신 말씀이
우리 분란이 학교 고마도라
우리집 살림을 사라야 댄다
여자은 공부를 안 해도 댄다 하셨다
학교로 안 가니 너무 맘이 아파 밥도 안 먹고
누버서 우럿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대로 안됐다 울고 있으니 엄마가
아버지 병원 퇴원하면 학교 보내주겠다
그 말에 속았다 이레 속고 저레 속고
한평생 다 갔다
늦게 공부하시는 분이 글을 배우고 쓴 시인 것 같은데, 제목이나 글에서 보이듯 예전 어르신들은 배움에 대한 갈망이 크다. 사실 제 때는 너무 배워서 싫은 경우다. 그래서 크게 와닿지는 않지만 부모님 세대에서는 이런 경우가 더 많았던 것같다. 얼마전 라디오에서 들은이야기가 생각난다. 장수사회가 되면서 100세까지 사는 분이 많이 계시는데 60세부터 실버, 노인이라고 칭하지만 이분들은 60세가 젊은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부터 무언가를 배웠다면 90세까지 30년을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무언가에 전문가가 되어있겠다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말하는 실버가 젊은이 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막판이 저렇듯 타오른다면 | 정양
가으내 단풍 구경을 다녔다
단풍잎만 단풍이 아니다
물드는 건 다 단풍이다
정년퇴임한 가을이 산마다 곱다
얼레덜레 물들던 산그늘이
알록달록 수런거리던 산자락이
골짜기마다 마침내 울긋불긋 타오르거니
새 울음 소리 눈물 없듯
골짜기들 타올라도 연기 없거니
막판이 저렇듯 타오른다면
사람살이 얼마나 아름다우랴
타오르는 골짜기들이
소리도 눈물도 연기도 없이
막판의 가슴을 훑어내린다
시가 어렵다. 모든 인생의 절정이 아름답지 않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강사
이 시인은 76세정도 되었다. <헛디디며 헛짚으며>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다. 나이듦에 관한 성찰, 사유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만나는 어르신들이 그런 분이 분명히 계실것이고, 그런 분들처럼 잘 익어가고 잘 타오르길 바라는 마음이다.
시흥문화원
시 안 쓰는 시인들 | 김해자
무의도 섬마을에서 문학교실을 하는데, 갯벌에서 박하지 잡다 오고 산밭에서 도라지 캐다 오고 당산에서 벌초하다 오고 연필 대신 약통 메고 긴 지팡이 짚고 왔습니다
저 고개 너머, 자월도 살던 대님이라고 있어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 모냥 갸름한 게 여자는 여자여
내가 죽으면 어느 누가 우나
산신령 까마구 드시게 울지요
일본 말루다 그렇게 슬픈 노랠 했어
첩으로 살다 아이 하나 낳구는
덕적도로 시집가 죽었어
공중에 펼쳐진 넓디넓은 종이에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까막눈이 시 속으로 대님이가 까악까악 날아왔습니다 이 땅에 시 안 쓰는 시인 참 많습니다 명녀 아지 은심이 숙희 승분이 경애 춘자 상월이 이쁜이, 시보다 더 시 같은 생애 지천입니다
우리나라 등 세계 많은 시인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고매한 정신과 책상에 앉은 시간에서만 대단한 시가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삶에 찌든 인생이나 노동자들도 그보다 더 좋은 시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강사
인천 앞바다에 무의도라는 섬이 있다. 김해자시인이 거기서 몇년전에 섬에 계시는 어르신들과 프로그램을 참여 하면서 경험을 쓴 것이다. 칠곡 할머니 같은 분들을 일컬어 시안쓰는 시인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분들을 참여시키고 그 안에 있는 시들을 끌어내는 것이다. 교육, 가르친다는 뜻의 에듀케이션(education)의 어원은 라틴어인 에듀케레(educere)라는 말인데 그 말은 무언가를 끄집어낸다라는 뜻이다. 끄집어내는 것이 교육이다. 기능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선생님들이 기능교육을 넘어선다면 질박한 삶의 이야기가 언어로 무용으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 이름은 문학의 밤 | 이상국
내 이름은 문학의 밤입니다
친구들 모임 같은 곳에 가서
누군가 “어이, 문학의 밤, 한잔 받아” 하면
나는 “미친 녀석” 하면서도 덥석 잔을 받습니다
나의 앨범 속에는 유난히 밤이 많습니다
별이 빛나던 밤이나 눈보라 치던 밤 혹은
너 아니면 죽고 못 살던 밤
그리고 시체 같은 밤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어둑한 길을 혼자 걷는 밤이 좋았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문학의 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부지런해도 아직은
문학의 아침이나 문학의 저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문학은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밤’은 ‘문학은 밤’과 같은 말이어서
시인들은 대체적으로 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차마 잊지 못할 밤이 있는가 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도 있게 마련입니다
많은 밤들이 물결처럼 왔다가는 스러져가고
나에게는 문학의 밤만 남았는데
아직도 그 어둑한 길을 혼자 다닌다고
친구들은 일부러 즐거운 술잔을 건네는 것입니다
나는 문학의 밤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문학의 현실을 문학의밤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되었다. 어르신들의 문화예술도 아직까지는 관심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인처럼 어르신들도 묵묵히 해나간다면 문화의 아침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사
저는 내 삶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의 차원에서 생각해봤다. 문학은 밤이라는 표현은 승리하고 빛나는 것이 아닌 낮고 어둡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인데, 스스로 선택한 그 삶에 대한 당당함과 자부심을 확인하게 된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꿈보다 좋은 해몽에 박수드린다.
하늘접시 | 이정록
시골 엄니를 위해 누님은 에어컨과 스카이 라이프를 달아드리고 아우는 텔레비전과 청소기를 사드렸는데, 맏아들인 나는 병아리 눈곱만큼 나오는 전기료와 벙어리 전화세 내드리는 게 전부다
그런데 누님은 누님이시다
누님이 달아드린 그 위성 안테나가 치매 걸린 광줄댁, 풍 맞은 대밭머리 아주머니, 수다와 버캐가 전문인 박달자 할머니까지, 동네 과부들을 어머니 방에 다 모이게 하는 것이다 모두 모여 벌건 대낮에 훌러덩 식식거리는 영화를 꼴깍꼴깍 보고 계신다 이 집 텔레비는 원제 저리 다 벗겨 놨댜? 어이쿠 어이쿠 저 양코배기 방아 찧는 것 좀 봐 풍 맞은 몸으로 흉내내려니 반쪽만 에로배우다 굳은 한쪽 팔다리는, 주책 좀 그만 떨라니까! 젊어 떠난 서방이 엉거주춤 옷섶 추슬러주는 듯하다 풍 맞고야 앞서 간 남편과 몸을 섞다니,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함박꽃 틀니들, 공옥진 초청공연이 따로 없다 웃음바다에 둥둥둥 떠가는 치매의 복사꽃잎들, 떠돌이 약장수에게 약 들여놓는 일도 없어졌다 이제 나는 노파 전용 영화관의 맏아들이다 돌아가시기도 전에 벌써 스카이 라이프이라니! 짠하기도 하지만,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녹슨 처마 끝 천국의 접시여 하느님도 세상 재미가 쏠쏠하신가 새털구름 불콰한 하늘접시여
저는 저희 부모님세대에서 케이블티브이가 없어서 채널이 KBS밖에 없었고, 농사 후 뉴스만 보시고는 주무시는 생활을 반복했었다. 시 안에서 누님이 케이블을 달아드리면서 어르신들이 야한영화를 접하는 일들이 어떻게 보면 주책 맞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사실 정신이 나이를 먹는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님은 누님이시다’ 라는 시어에서 누님이기 때문에 누님이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들의 마음을 캐치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기획자들에게 누님의 역할을 해서 어르신들께 인생의 새로운 맛을 보게 하는 역할을 해야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강사
이정록시인이 어머니들께 인기가 많다. 자기의 경험을 쓴 시다. 할머니라고 해서 에로스에 대해서 모른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문화프로그램은 너무 범생이 필이 나는 것이 아닐까? 어르신들이 진짜 요구하는 것을 하고 있는가? 스피노자가 이야기 한 기쁨의 증진, 기쁨의 강화와 관련되는데 어르신 프로그램에서 과감하게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의 궤도에서 조금은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윤여정씨 영화 <죽여주는여자>를 좀 보시고, 노인의 실상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다르게 바라보는 공부도 필요하다.
택배 상자 속의 어머니 | 박상률
서울 과낙구 실님이동······. 소리 나는 대로 꼬불꼬불 적힌 아들네 주소. 칠순 어머니 글씨다. 용케도 택배 상자는 꼬불꼬불 옆길로 새지 않고 남도 그 먼 데서 하루 만에 서울 아들집을 찾아왔다. 아이고 어무니! 그물처럼 단단히 노끈을 엮어 놓은 상자를 보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갑자기 터져 나온 곡소리. 나는 상자 위에 엎드렸다. 어무니 으쩌자고 이렇게 단단히 묶어놨소. 차마 칼로 싹둑 자를 수 없어 노끈 매듭 하나하나를 손톱으로 까다시피 해서 풀었다. 칠십 평생을 단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고 단단히 묶으며 살아낸 어머니. 마치 스스로 당신의 관을 미리 이토록 단단히 묶어 놓은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 가지 마시라고 매듭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풀어버렸다. 상자 뚜껑을 열자 양파 한 자루, 감자 몇 알, 마늘 몇 쪽, 제사 떡 몇 덩이, 풋콩 몇 주먹이 들어 있다. 아니, 어머니의 목숨들이 들어 있다. 아, 그리고 두 홉짜리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 한 병! 입맛 없을 땐 고추장에 밥 비벼 참기름 몇 방울 쳐서라도 끼니 거르지 마라는 어머니의 마음.
아들은 어머니 무덤에 엎드려 끝내 울고 말았다.
저는 자시의 삶을 많이 포기하고 살고있는 모습에서 프로그램을 이용하시는 어르신을 대입해봤는데, 정작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살고 있는 모습이 비슷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강사
맞춤법도 다 틀리게 쓴 어머니의 글씨 안에 담긴 물품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삶이 담긴 관처럼 보였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디
제목처럼 경로를 벗어나면 위반이지만, 어르신에 대한 노인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보이고, 저 또한 앞으로 그렇게 해야겠습니다.(ㅎㅎㅎ )
강사
처음에는 위반이지만, 길을 가다보면 길이 생긴다라는 표현처럼 아름다운 위반이 필요 하겠다.
매화 배움학교 | 도필선 (경북 칠곡 할매)
매화 배움학교 입학생 땡땡
벌써 일년이 지나버렸네
매일 포도밭에서 포도 송이 같이 씨름하다 보니
포도알만 땡굴땡굴 눈에 밝히더니
이제는 포도알이 ‘ㅇ’이요 포도잎이 ‘ㅍ’ 같다
오래 살다보니
오래 재밌는 일도 있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매화 배움학교 선생이 되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교실에 들어가니
포도 송이 같이 땡글땡글한 아이들이
나만 쳐다본다 내 얼굴만 쳐다본다
희안하고 신기하다 내가 할매 선생님이 되었다
오래 살다보니
오래 재밌는 일도 있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사실 시를 읽고 부끄러워서 발표를 안하려고 했다. 어르신문화사업의 담당자로서 행사와 서류에 밀려서 문화생활을 해보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겐 없었다. 현실의 생활인으로서 살고 있는 나에게 이런 시간을 주신 것에 감사한다. 사실 오늘 워크숍에 쉬고 싶어서 왔다. 회의에 서류에 민원이 많다. 하물며 가입도 안하신 어른신이 오셔서 문화원을 탈퇴한다고 말씀하시면 무슨 이야기든 들어드려야 한다. 사실 읽으면서 내가 어르신문화사업을 너무 오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화배움학교 땡땡땡은 실버문화학교에 입학하셨구나, 배웠다를 읽으면 어르신문화학교에서 배우셨구나, 선생이 되었다는 아, 봉사를 나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마지막에 오래살고 볼 일이다... 마지막 한줄에서 느껴지는 것이 담당자로서 어르신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획자교류사업이 필요한게 어르신담당자들이 함께 같이 소통하면서 좋은 기획을 하는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사 스스로를 디스하시면서 멋지게 발표해주셨다. 이 시가 이야기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역린(逆鱗)>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중용23장을 낭독하는 것으로 워크숍을 마치겠다. 결국 멀리 있지 않다.
[산문] 중용(中庸) 23장
_ 영화 <역린> 속 상책(정재영 분)의 대사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강사
연습하신 것처럼 잘 읽어주셨다. 평소 시나 글을 접하는 게 좋다. 어린이들이 넘어지면 어떻게 일어나는가? 땅을 짚고 일어난다. 이 것을 뜻하는 말이 ‘인지이도자 인지이기(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땅에서 넘어진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말이다. 지금의 마음의 바닥을 생각하시면서 살다가 넘어지고 자빠질 때, 내 눈앞의 현장에서 어떻게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어떤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말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삶이 있는 저녁’이겠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참여하신 어르신들에게 삶에 중요한 매듭이 되고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시고, 스스로 자기에게 꾸준하게 업데이트 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서 마음의 담장을 허무는 시도를 한다면 더 나은 내가 되고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