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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문화민주주의와 시민 문화활동가 양성

정윤수 |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2016년, 전세계를 강타한 문화적 사건은 팝가수 밥 딜런이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일 것이다. 밥 딜런의 노래는, 오래 전부터, 격조 있는 어휘에 읊조리는 듯하면서 라임이 적절하게 전개되는 높은 수준의 문학적 음악성을 지녔음을 평가받아 왔으나, 그래도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할 정도인가 하는 부정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시인 고은을 비롯하여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 2016년에 ‘박경리문학상’ 수상자가 되어 내한한 아프리카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 몇 년째 유력자로 거론되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등에 비한다면 밥 딜런의 수상이 의외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스웨덴 한림원의 발표문이나 기자회견을 자세히 살펴보면 21세기의 문화예술이 어떤 가치와 지향을 가져야 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고, 그 점에서, 밥 딜런은 수상작가은가 되기에 충분하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의 노래 가사가 ‘시의 형식에 흡사’하다거나 ‘대중음악 가사도 문학의 일부’라는 이유로 결정한 게 아니다. 
 
 시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 형식은 비교적 긴 시간대를 버티긴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역사적 주기를 따라 변화한다. 똑같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세르반테스와 발자크와 카프카는 적어도 그 형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예술의 옷을 입고 있다. 미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빈치와 세잔과 백남준은 당대를 대표하는 미술가이지만 그 표현의 옷은 전혀 다르다. 
 
 중요한 것은 거시적이긴 하나 틀림없이 변화하는 어떤 예술의 옷, 즉 ‘형식’이 아니라 그런 차이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철되는 예술 그 자체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와 사회적 의미, 그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스웨덴 한림원은 판단했다. 이른바 ‘문학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선정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문학적인 것’이란 ‘문학과 형식상 흡사한’이란 뜻이 아니라, 기존의 제도와 관습으로 보면 장르로서의 문학은 아닐 수 있지만 문학이, 혹은 문자가 역사상 해온 예술적 본질과 사회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면 그 겉옷, 즉 제도로서의 형식이 기존 문학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결정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웨덴 한림원은 이미 2015년에, 정형화된 소설이라기 보다는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작품들, 즉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마지막 목격자들> 등을 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문학상을 수여한 바 있다. 이때도 스웨덴 한림원은 “그가 한 수 천 건의 인터뷰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인간 존재의 역사를 알려주는 동시에 감정의 역사, 영혼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고전적인 소설의 형식을 잘 갖춘 소설이냐 하는 점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실험’이 문학 내부를 더욱 확장시켰다고 평가한 것이다. 다시, 밥 딜런 얘기를 하자면 그는 수상 소감에서 셰익스피어를 언급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무대를 위한 말을 썼다”고 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셰익스피어가 ‘문학’을 쓰기 보다는 “이 역에 맞는 배우는 누구지? 어떻게 무대에 올리지? 이 작품 배경을 덴마크로 설정하는 게 맞나?” 같은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문제에 골몰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전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2015년, 영국의 최고 권위 미술상인 터너상 수상자로는 리버풀의 낙후한 주거단지에서 활동해온 18명의 20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선정되었다. ‘어셈블’(Assemble)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유서 깊은 항구도시이자 산업도시인 리버풀의 오래되고 낡은 공공주택단지를 개조하는 프로젝트 ‘그랜비 포 스트리츠’(Granby Four Streets)로 수상을 했다. 18명의 젊은 예술가들은 황폐한 빈민가에 남아 마을을 지키려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낡은 집을 수리하고 놀이터를 만들고 시장을 활성화하는 미술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폐자재들을 모아서 책장도 만들어 자활과 재생의 모범을 선도했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도시의 고급주택화로 원래 살던 주민이 대책 없이 떠나야만 하는 현상)에 맞서 예술이 실제의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평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2016 올해의 작가상’도 조지은과 양철모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믹스라이스’가 받았다. 그들의 주요 작업은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한 문화활동이다. 오랫동안 그들은 경기도 마석 가구단지 같은 곳에서 제3세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겪었고 따라서 문자, 사진, 공연, 영상 등 수많은 기록물을 갖게 되었다. 이를 선별하고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들의 ‘미술작업’이다. 
 
 일본에서도 이같은 작업이 크고 작은 도시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특히 중소 도시의 경우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전반적으로 쇠락해가고 있는데, 그 사이로 예술가들이 들어가서 주민들과 함께 자활과 재생과 활력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제주의 소리>가 답사하고 취재한 바에 따르면, 히로시마의 경우 ‘칡 아트 프로젝트’, ‘휴경 논 진흙 벨리 대회’, ‘반딧불 이벤트’, ‘문화재 DIY 복구’, ‘납량 불꽃 축제’ 등 마을 고유의 자원을 가지고 다양한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100여개 단체에서 200여개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고, 총 참여인원은 5000명에 달한다. 수익모델 마련에 조급해하는 대신 주민들의 공동체 활성화, 더 행복한 일상에 초점을 맞췄다. 궁극적으로 이 같은 방식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히로시마 주민들의 마음을 <제주의 소리>는 전하고 있다. 
 
 그 주도적인 인물이 토호쿠예술공과대학 교수이자 studio-L의 대표인 야마자키 료. 사람과 마을이 서로 연결되는 방법을 찾기 위해 탐색하고, 현지 주민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 분석 데이터와 디자인 제안을 공공사업에 접목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펼쳐온 인물이다. 국내에 그의 주저인 <커뮤니티 디자인>과 <작은 마을 디자인하기> 등이 출간되어 있다. 야마자키 료는 <커뮤니티 디자인>에서 “우리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외부 사람은 언젠가 그곳을 떠난다. 차라리 그 마을에서 우리와 뜻이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 사람들과 활동의 참맛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할 주체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때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다.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디자인이 아니라 과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design이라고 쓴다. de-sign이란 단순히 기호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사인(sign)에서 벗어나(de), 과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된다. 
 
 <제주의 소리> 취재진은 “그는 애당초 어떤 구상을 미리 정해놓고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다. 마을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는다.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지역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주민들이 직접 해법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연결하고, 판을 깔’ 뿐이다. 현지 주민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들의 제안을 공공사업과 접목한다”고 야마자키 료의 작업을 평가(이상 인용한 기사는 <제주의 소리>, 2017년 7월 20일자)한다. 
 
 이렇게 여러 사례들을 먼저 소개한 것은, 이 글의 핵심 주제, 즉 경기도문화원의 시민활동가 양성 사업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와 같은 가히 ‘전세계적’인 문화적 양상부터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다시피, ‘경기도’와 ‘경기도문화원’에서도 위에 두루 소개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시민 문화 활동을 촉진하고 그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활동가들을 양성하고자 한다. 이 활동과 사업이 국지적이고도 특수한 일이 아니라 나라 안팎에서 전반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문화적 흐름이자 의미 있는 운동임을 재삼 확인된 셈인데, 이를 위하여 몇가지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의 중앙정부와 각 지방정부에서도 ‘마을 재생’을 화두로 꽤 오랫동안 지속적인 정책과 사업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지난 10년 가까이 이 사업들은 피상적이거나 국지적으로 산만하게 전개되어 왔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지난 10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중앙 권력이 사실상 이 ‘마을 재생’에 대하여 정책적으로 빈곤하였고 그에 따라 의미 있는 방향 제시와 정책적 의지의 결행이 부족했다. 경기도를 비롯한 몇몇 지자체에서, 이 문화 운동을, 단순히 ‘마을 가꾸기’가 아니라 높은 차원의 지방 자치와 분권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도, 중앙 정부의 정책과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이 사업은, 개별 마을과 주민과 활동가들에게는 ‘마을’ 단위의 작고 소중한 일상이지만, 지방 자치와 민주주의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우선 접근해야 한다. 지난 7월 25일, 국회에서는 ‘전국자치분권민주지도자회의’가 주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자율과 협치의 원칙으로 문화분권 기반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문체부와 지자체, 광역·기초 문화재단 등이 참여하는 권역별 지역문화협력 네트워크를 운영해 협치를 실현”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네트워크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협치인가. 이날 토론회에서 이원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형식적인 ‘협치 가버넌스’ 문화를 “1년에 두세 번 회의 개최하는 것, 회의에 오자마자 계좌번호 쓰고 사인하게 하는 것, 한 마디씩 돌아가며 덕담하는 것. 이건 협치가 아니다”고 통렬히 비판하면서 협치의 본질은 “국가를, 도시를, 권력을, 재원을 함께 기획하고 나누고 사용하며 조율하는 것이다. 최근 도시정책을 둘러싸고 유행하고 있는 참여민주주의, 사회적 경제, 협동, 공유, 생태계, 커뮤니티 등의 개념들이 지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협치라고 강조한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도 새로운 시대의 지역문화 정책은 “풀뿌리 민주주의에서 출발”해야 하며 지역의 마을 민주주의 역량을 두텁게 하고 드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예술가들이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며 또한 지역 주민들 중에서도 역량 있고 주체적인 사람들이 시민문화 활동가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대때 예술가들과 시민문화 활동가들은 “마을 민주주의를 씨 뿌리고 꽃 피우는 과정에서 예술의 가치와 사명을 표현하고 행동할 줄 아는 시민-주민이자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가령 ‘엘 시스테마’(El Sistema) 사업을 보자. 가난한 아이들에게 악기를 나눠주고 클래식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 말이다. 베네주엘라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흐름을 탔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지자체와 뜻 있는 음악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베네주엘라를 제외한 나라들에서는 시혜적인 차원에서 그친 경우가 많았다. 이 운동은 경제학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1975년에 지하차고에서 시작한, 음악을 통한 사회개혁(Social Action for Music)의 일환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바로 사회개혁(Social Action)이다. 엘 시스테마 프로젝트의 정신과 가치, 그것은 곧 사회개혁이다. 아브레우는 베네수엘라의 극빈층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구제하고 이들의 원활한 사회 진출을 도모하는 한편, 나아가 문화적 차별과 소외를 해결하고 빈부격차까지 최대한 좁혀볼 수 있는 방안으로 비경제적인 분야, 즉 음악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저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고급문화를 접할 기회를 제공해주자’는 식의 시혜적 차원의 일이 아니다. 베네주엘라의 ‘엘 시스테마’는 사회개혁을 위하여 음악의 미덕을 훌륭히 활용한 것이다. 이 정신과 거리가 먼, 선심성 행사의 변형된 ‘엘 시스테마’는 여러 곳에서 중단되거나 실패하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역시 민주주의와 일상 문화의 결합이며 그 핵심에 참여하는 주민과 열성적인 시민문화 활동가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민문화 활동가는, 단순히 특정한 예술적 재능의 확산이 아니라, 지역 상황에 대한 이해 및 각 문화 사업에 대한 기획과 운영에 대한 참여까지도 가능해야 한다. 나이, 성별, 직업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지역사회 문화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속에서 적극적인 시민문화 활동가가 나와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베 레비츠키의 <모두를 위한 예술?>은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21세기의 공공 예술 혹은 시민 참여 예술은 “더 이상 도시미화를 위해 공공 공간에 투입되거나 단순히 물리적으로 장소 특수적 설치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를 넘어서 공공 즉 모두를 위해 민주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실천적인 성격을 본질”로 삼는다. 단순히 “예술작품을 건물 또는 장소에 부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사고를 도시개발의 과정 안으로 직접적으로 편입시키고 이용자들 또는 주민들 사이에 소통의 과정들을 창출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임을 우베 레비츠키는 역설한다. 공공미술의 과거와 현재, 그 예술적 실천의 배경이 되는 인문학적 이론, 새로운 유형의 공공미술 작품들에 대한 정보 등을 개괄하는데 이 책은 요긴하다. 
 
 레비츠키의 책이 주로 이론과 작가 중심이라면 파블로 엘게라의 <사회 참여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시민과 함께 하고 시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 활동의 실천적 근거와 사례를 살피는데 유용하다. “프로젝트에 대해 주인 의식을 느낄 만한 다른 동기도 없는 상태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지도 못하는 협력자들에게 적극적인 참여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어떤 한 집단 전체가 한번 경험 삼아 해보자는 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동기가 없다면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엘게라는 지적한다. 또한 엘게라는 예술가의 ‘기능’이나 창의적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예술가들은 작업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사회학, 교육학, 언어학, 민족학 같은 다양한 학문에서 축적된 지식에서 큰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상의 책과 더불어 국내 학자들과 예술실천 활동가들이 공저한 <생활 예술>은, 바람직한 문화 민주주의의 확산과 시민참여 혹은 시민주도 문화 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례와 제안을 담고 있는 책이다. 시민의 삶에 기반한 ‘생활예술’에 대해 꾸준히 활동하고 토론한 학자·활동가·행정가 등이 함께 썼다. 
 
 공저자들은 생활 예술에 대해 “시민(주민)이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생활 속에서 주체적으로 수행하는 예술적 활동”이라고 정의하면서 주민(시민)들이 일·가족·사교 등의 사적 영역에서 자기를 계발하고 표현하는 예술 활동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19세기 중후반의 첨단 예술가 중심의 모더니즘 전통에서부터 문화와 생활의 모든 요소가 상품으로 되는 신자유주의 광풍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사 전반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삶의 예술’ 곧 생활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를, 공저자들은 다양한 이론 점검은 물론 성남문화재단의 사랑방문화클럽, 인천의 시민문화공동체 ‘문화바람’ 등 국내의 다양한 실천 사례를 검토한다.
 
 이상의 여러 사례들과 책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역시 ‘민주주의’다. 시민 문화, 마을 재생, 마을 예술, 마을 가꾸기 및 시민 문화 활동가 등의 진정한 활성화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가 하는 점이다. 시혜적인 차원의 단순한 문화 체험이나 나누기가 아니라, 문화를 통하여 삶을 성찰하고 예술을 통하여 일상 생활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시민 문화이며 생활 예술이다. 그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주도자가 바로 시민문화 활동가다. 이러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저서 <클래식, 시대를 듣다>, <인공낙원>, <노동의 기억 도시의 추억, 공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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