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 현 유알아트
지역에서 문화원들이 갖는 무게감은 일상의 피로감만큼이나 크다.
오랜 시간 지역에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각각의 역할과 관계를 만들어 왔다. 그러한 과정이 이제는 과중하고 일반적인 업무 영역으로 해석되는 지점으로 치닫고 있다.
다양한 문화주체와 담론, 정책들이 만들어 지면서 그동안의 문화원 고유 역할이나 정체성에 대해 변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단순히 정체성의 혼란이나 위기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의 가치와 더불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온 문화원. 이제 그 문화원은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답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찾아 가야 한다. 전통과 향토, 토착이란 단어들의 나열이 아닌 새로운 전통과 미래의 전통이 앞선 단어들과의 조합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해야 한다. 그 새로운 등장은 우리의 일상에서 미래와 만날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일상적 삶과 분리되어져 박제화 되거나 단순 보존이나 보전 되어져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 내는 의무가 아니어야 한다. 의무로 남는 과제가 아닌 우리가 즐기며 살아감의 소용과 활력이 되어 질 것들이 실험되고 만들어 져야 한다.
오늘의 일상이 미래가 되는 문화를 만들고 확산해 나가는 문화의 주체가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문화원의 모습을 꿈꾸고 제안 해 본다.
“전통에서 오늘을 살아갈 해답을 찾고 미래를 책임지는 오늘을 산다.”
“경제란 석탄을 아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석탄이 불타고 있는 동안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데 있다.”
- 랠프.W.애머슨 -
앞에서 전제한 두 개의 글이 앞으로 본인이 이어갈 글들의 전부이자 회귀점들이다.
미래의 전통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현재에 무엇을 더할 것인가와 현재에 과거가 묻어있는가를 동시에 바라봐야 한다.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지역의 일상은 수천 년의 시간을 담고 있다. 불과 몇 십 년에서 몇 백 년에 이르는 근대화의 과정이 오래된 시간을 지우고 있다.
시간이 지워진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온 경험적 삶의 토대를 지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사람과 시간과 환경이 준 도전과 응전의 결과들이 응축되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쁜 시대를 살아내며 과정의 소중함을 자신도 모르게 밀쳐내고 있다.
이 짧은 시간의 지나침 속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예기치 못한 재난과 재앙들을 만나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본질적인 자연의 섭리와 분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조상들의 삶의 궤적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기억마저 사라져 갈 손의 기억과 삶의 기억들을 되찾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 모두 사라지기 전에.
토착적이라는 말 속에는 시간과 사람과 자연이 버무려져 있다. 그 안에서부터 하나하나 들춰내고 각각의 가치를 되새김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미래를 살 방법을 찾고 새로운 덧대기를 해야 한다. 과거나 토착이 모든 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구조에서 스스로의 삶을 가능케 하는 원리와 방법들을 전해 받을 수 있다.
이제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돈이 아니면 삶을 살수 없게 만드는 참담한 현실을 어디에서나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자본의 구조를 벗어나 토착적 삶의 원형과 만난다면 삶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조상들의 삶의 방식에 묻어나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토착적 삶의 기술이나 원형들만으로 미래를 살아갈 방법들이 찾아질까?
답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토착적 환경이 주는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고수되어질 필요는 없다. 가감할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새롭게 진화 시켜야 한다. 진화의 방법에 대해 편리함과 순간적 경제성만을 이야기해서는 진정한 답이라 할 수 없다.
석탄을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태우는 것이 답이 아니라 그 석탄이 불타고 있는 동안 우리는 무엇, 무엇,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논리나 시스템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아닌 삶의 문화라는 측면의 접근이고 답일 것이다.
우리는 요즘 적정기술이나 대안적 삶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는 환경이나 경제, 또는 공동체에 대한 영역까지로의 확장을 이야기하는 단위들과의 만남을 쉽게 가져 갈수 있다. 하지만 과정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들여다보고 선택해야하는 지점들이 있다. 그 접점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를 책임지는 태도이자 과제일 것이다.
우리가 고민의 출발점에 두어야 할 명제들
미래의 전통문화 발굴을 위한 전제
무엇을 미래의 전통이라 할 것인가?
미래의 전통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
미래의 전통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 및 협력 시스템 강화
미래의 전통문화 육성을 위한 방안
미래의 전통문화 분야에 대한 현황조사 및 자원조사
미래 전통문화 분야의 인적 네트워크 강화와 지원구조 정착을 위한 노력
일상의 영역에서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으로의 확산 및 보급을 위한 방안 마련
우리가 선택할 미래는 있는가?
2011년 일본의 쓰나미를 보면서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지구의 환경변화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일본 원전이 무기력하게 파괴되는 현장을 보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에너지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의 ‘자본에 의한 에너지 의존도’는 세계 최고수준이라 한다. 전 세계의 75%는 아직도 바이오에너지를 주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아시아의 60%는 아직도 나무를 때서 난방과 취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실정은 수입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고 동시에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원자력을 주 에너지원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 그에 대한 지원은 강화되려 한다. 어찌되었던 우리의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립적 에너지원을 활용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지역의 현실을 더듬다보면 그러한 현실은 삶의 압박으로 다가온다. 지역에서는 에너지를 아끼려고 냉방에서 주무시거나 생활하는 어르신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아니 태반의 어르신들이 그렇게 살고 계신다. 우리는 그것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치부하며 외면하기에는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것을 그들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네 일상이 자본이나 세상의 흐름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던 모습을 상기할 수 있다. 스스로의 밭에서 난 것을 먹고 스스로가 해오던 땔감들을 요긴하게 사용하면서 살던 모습이 바로 엊그제 같다. 이제는 누구도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하지 않는 보편적인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중앙이나 지자체의 지원구조에 의존하거나 척박한 현실을 탓하며 살게 되었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하며 다른 대안과 만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근간의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은 조금만 노력을 더하면 전혀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화목공정이라는 국가적 지원구조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개량형 화덕을 보급하고 있다. 글로벌 석유 회사인 쉘 역시 아프리카에 개량형 화덕을 보급하였다.
아마 중국에서 이런 일들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면 중국의 사막화는 더 급속한 속도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노력을 하는 것은 그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기에 생겨난 움직임이다.
우리는 가마솥화덕이나 온돌 등을 매우 소중한 전통자원이라 말한다. 가마솥화덕을 이용해 밥을 짓거나 국을 끓이면 그 맛이 다르다고 한다. 특별한 날이나 공간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가마솥 화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에너지원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실제 열효율이 20%에 불과하다. 각 나라의 화덕이나 난방시스템을 연구하는 집단들이 형성되었고 효율이 좋은 화덕이나 난로 또는 또 다른 방식의 난방을 연구하고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적정기술 화덕은 100%에 가까운 열효율을 보여주고 있다. 100%의 열효율을 얻으면서도 기존 연료의 20%만 사용하면 된다. 나무 10개를 쓸 것을 나무 2개만 때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잔가지들을 써도 될 정도이니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쓰기에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자신들이 개발한 그러한 화덕과 난로를 만드는 것을 가르치고 보급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굳이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주변의 자원들을 활용하여 만들 수 있도록 보급하고 상호 보완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이나 기술을 “적정기술”이란 이름으로 불러준다. 이러한 행위적 시도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사고의 전환을 이뤄내고 있다. 일상이나 생활의 면면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새로운 생활문화로 전환하는 과정을 만들어 가고 있다. 단지 에너지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삶의 문제와 만나게 되고 그것이 그들이 선택하게 되는 삶의 방식이 되어간다.
세상을 살면서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이고 일인가에는 다양한 선택의 폭이 있다. 실패한 사회주의나 실패한 자본주의를 넘어서 우리는 실패한 지구의 오늘을 보면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실패한 지구의 모습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미래는 우리만의 미래가 아닌 후손들의 미래이다. 우리가 그들의 미래를 박탈할 아무런 권리가 없음에도 우리는 오늘을 사는데 고민을 더하지 않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고 만들어 가는 미래를, 오늘의 현실이 미래의 전통이 될 수 있는가에 답하고 준비하고 만들어야 한다. 선택하는 소극적 개입이 아닌 적극적 개입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근래에 누렸던 편리함과 욕망의 찌꺼기들을 벗겨내고 후손들에게 새롭고 싱싱한 미래의 속살을 만나게 해줄 의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살펴보기 : 미래의 전통을 위한 답 찾기_인간중심의 기술, 적정기술로부터
1. 현지의 조건과 전통기술에 근거한 적정기술.
2. 전통기술 가운데는 보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들이 많다
3. 근대적인 진보를 거절하진 않지만 고대의 방법이 더 알맞다면 우리는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인간의 필요를 바탕으로 현지의 환경과 맥락을 고려해서 적용되는 기술, 제품 또는 서비스’를 뜻한다. 적정기술이란 용어에 포함된 ‘기술’이란 부분 때문에 많은 비기술 분야 일반인들이 어색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적정기술의 핵심은 ‘적정’이란 부분에 놓여 있다. 어떤 특정기술이나 제품이 ‘적정기술’인 것이 아니라, 사용자인 인간과 현지의 환경을 고려한 기술과 제품이 ‘적정기술’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적정기술의 원조는 인도 독립영웅인 마하트마 간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소금세에 저항하여 소금을 직접 만들고 영국의 면직물의 무차별적인 수입에 대항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직물을 만드는 저항운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스와라지운동의 정신은 적정기술이 주창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개념은 영국의 경제학자인 E.F 슈마허를 통해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로 구체화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적정기술이라 불리는 개념의 원조이다. 슈마허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통해 적정기술이 가진 개념의 포용성을 특정 기술이나 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성을 가진 사상으로 발전했다. 적정기술의 개념에는 기본적으로 대량생산, 대규모발전, 소비중심주의대신 소규모생산, 분산발전, 생태학적 생산과 소비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적정기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적정기술 관련자료발췌)
사례. 미래의 전통을 위한 답찾기-사람과 시간으로부터
1. 가고싶은 섬 매물도 – 하루를 살아도 매물도 사람처럼
가고 싶은 섬 매물도 사업 중 이미지 텔링과 휴먼웨어 파트의 사업들은 문화부의 “가고싶은 섬 ”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내용으로 섬주민들의 일상에서 자연에 순응하면서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자원들을 토대로 구성된 내용들이다.
이제는 잊혀지거나 외면당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들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남기는 메시지와 그 메세지를 중심으로 새로 드러나는 가치들을 이미지화 하거나 여행자의 눈길과 사는 사람들의 눈길의 접합점을 찾아 낸 것 들이다
2. 담양창평 슬로시티 – 주민생활문화교실 달팽이 학당
역사, 문화자원이 많은 담양의 창평 슬로시티에서 주민들과 함께 주민들의 삶의 공간을 중심으로 각각의 역할을 만들어 내고 미래의 전통을 만들기 위한 과정들을 보여준다.
전통적 자원과 새로운 적정기술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는 과정을 달팽이 학당과 여러 사업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담양창평 슬로시티의 전 지역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