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원 식 스토리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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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브랜딩의 시작은 스토리텔링
몇 년 전부터 문화계를 비롯해 전 부분에서 “스토리텔링”이 트랜드로 각광받고 있다. 앞서 영화나 음악 등은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방식이 각색과 패러디를 통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다만 이를 지역이나 문화적 특성으로서 연계시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야 점차 가시적인 성과들이 지역 축제나 지자체 마케팅의 수단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사실 지역 문화 스토리텔링의 경우에는 어떤 일정한 시점을 두고 진행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는 그 지역이 본래가지고 있던 환경적, 역사적, 문화적 특성들이 그 곳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삶과 문화 속에 이미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발굴하고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과 지원책이 미진하였기에 그 동안 몇몇 지역을 빼놓고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 본 “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 역시도 다산 정약용이라는 조선 최고의 실학자가 태어나고, 또 노년이 되어 삶을 마감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는 수원 화성을 건축한 학자로서만 유명할 뿐 마재마을과 다산 정약용을 함께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 그만큼 지역 문화 스토리텔링이 얼마만큼 중요한 지 또한 이를 대중들에게 알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한 다양한 일화는 앞서 지적한 바처럼 스토리텔링에 다양한 지원과 투자가 이루어진 곳에서 앞서 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수원시에서는 수원 화성을 건축한 정약용에 대한 다양한 일화와 인물 소개 등 그의 업적을 박물관과 신문, 영상자료를 통해서 홍보하고 있다. 이는 정조의 효의 도시 외에도 정약용의 실학의 도시로서도 접근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인문학 강의 등을 활용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수원시와 정약용의 관계를 연계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처럼 지역 스토리텔링의 경우에서는 스토리텔링의 기본적인 근거와 자료가 될 수 있는 역사적 자원, 인물, 삶의 환경 등 다양한 연구와 소재 발굴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는 앞서 진행했던 김포 용강리마을, 남양주 봉안마을과 마찬가지로 지역 스토리텔링에 귀중한 자산이자 집약된 연구자료라 할 수 있다. [경기 마을기록사업]에서 마재마을을 선정하게 된 배경을 유추해 보자면 다산 정약용이라는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의 고향으로도 중요한 학술적 연구대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환경적 변화 속에서도 마을을 지키는 마재마을 주민들의 삶과 모습, 문화 등을 통해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를 동시에 살펴 볼 수 있기에 타 지역마을 연구자료를 비추어봤을 때에도 보다 비중있는 연구자료가 아닐 수 없다.
2. 마재마을에 관하여
마재마을은 경기북부에 위치한 남양주 능내1리에 위치하며,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서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마을로 유명하다. 하지만 예부터 농토가 부족하고 6.25 전쟁과 근대 물류 유통방식의 변화, 팔당댐 건설 등으로 지역적 환경적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마을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지키고, 보존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현재는 ‘다산지구공원’과 ‘실학생태공원’이 조성되어 경기북부의 대표적 관광지로서 변모하고 있다.
『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를 읽다보면 마재마을의 생활상과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예부터 전해져온 조상들의 삶의 모습이 여러 지역에서 비슷하게 전승되고,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역적 환경적 요인에 따른 차별적인 역사성과 유래 등이 있어 이를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마재마을에는 지역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와 유적지, 전설 등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마을의 브랜드 역할을 하는 지명의 유래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첫째는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산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무쇠로 만든 철마(鐵馬)모양의 부적을 산 정상에 묻고 이를 제사지내서 생겼다는 유래인데, 이에 대해 정약용은 음사라며 이를 부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관련 사료 등이 남아있어 이를 단순히 부정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또 하나 지명 유래는 마을의 환경적 요인에서 나타난 유래로서 예부터 말을 타고 고개를 넘는 일이 많은 마을이라 말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말 마(馬)와 고개 현(泫)자를 써서 ‘마현(馬蚿)’으로 불리었다는 이야기로서 당시 생활상과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이 역시 지명유래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마을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다양한 지명과 이야기가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산에서 나온 쥐만한 크기의 철마(鐵馬)에서 유래한 ‘철마산(쇠말산)’이나 정약용이 배를 타고 즐겨 다닌 ‘족자섬’, [삼국사기] ‘열전’을 통해 전해지던 도미부인과 도미나루에 대한 설화가 전해지는 “두미강(일명 도미강)”, 팔당댐이 생기면서 사라진 12바탕 잉어몰이 등 마재마을의 옛 모습을 이야기와 지명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마재마을은 아름다운 풍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역사적 유래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이자 나주 정씨가 마재마을에 정착하면서 남겼던 여러 사료를 통해서 마재마을의 당시 모습과 생활상 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나주 정씨가 정착한 것은 입향조 정시윤이었다. 정시윤은 “동쪽에는 두 물이 새로 모여서 여울물이 잔잔하지 않고, 서쪽에는 골짜기 입구가 처음 갈라져서 바람이 모이지 않았다. … 정자 앞에 괴송(怪松)이 자라 용(龍)이 도사리고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 것과 같으며, 거북이 움츠리고, 학(鶴)이 목을 길게 뺀 것 같이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다.
정시윤은 당시 한강의 상류 부분인 소천에 자리한 반고(盤皐=대야 모양의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도 그렇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도 농토가 부족하고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강 뱃길을 이용한 물류 유통의 상업취락으로 마을이 번성하였다. 하지만 후에 나주 정씨 일가가 번성하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물자가 한정되며 학문 연구를 위해 필요한 물품구입조차 어려워지자 중서사약((中書社約)을 운영하며 문필가의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부족한 농토지를 대체할 근교 농업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나주 정씨 일가에 대한 사료를 통해 마재마을이 점차 마을의 형태를 띄고 발전해나가는 발전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생활상 외에도 마재마을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풍광의 모습은 정약용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지리적 특수성과 경관 특성을 반영하고 있어 마재마을에 대한 환경적, 역사적, 문학적 사료로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봄, 시작 : 검단산의 꽃구경
· 여름, 청각 : 흥복사의 꾀꼬리 소리 / 여름, 체험 : 석호정의 납량
· 가을, 늦은밤, 시각, 원경 : 사라담의 달밤에 배를 띄운 풍경
· 겨울, 체험 : 송정의 활쏘기
이 밖에도 나주 정씨 일가는 마재마을에 다양한 역사유적을 남겨 지금의 다산생태공원, 실학박물관 등 마재마을 스토리텔링 관광지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마재마을은 다산 정약용이라는 실학자로 인해 실학의 마을이라는 마을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사회 발전과 개발 등으로 마을 주민들의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개발과 삶의 변화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겪은 삶의 변화는 근대 마을 변천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마재마을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분석하는데 있어 시기적 기준점은 팔당댐이 생기기 전과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팔당댐이 생기기 전에는 현재보다 더 넓은 농토에서 농업과 어업 중심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다 점차 산업화가 되어가면서 골재 채석장으로서 변모하며, 경기도 일대 대표 골재 채취장으로 번성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팔당댐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농토 일부와 십리가 넘게 펼쳐졌다던 자갈밭이 모두 수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이로인해 골재 채취 등으로 생업을 하던 주민들이 이전 및 이사를 하게 되고 팔당댐이라는 관광지를 중심으로 일부 주민들은 가게나 식당 운영 등의 생업을 마련하며 살고 있다. 이 외에도 환경적, 지리적인 요건을 활용해 누에치기나 유기농기법 포도 재배 등근교 농업 방식을 활용한 특화 농업으로 다시금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이처럼 마재마을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변화를 여러차례 겪으며 다양한 시대적 변화를 생업과 마을 형태의 모습 변화로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라 할 수 있다.
3. 스토리텔링의 시작은 마을지역조사
많은 역사학자들은 문화적 변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거시적 역사라 지칭한다. 마재마을은 나주 정씨 일가의 정착과 6.25전쟁, 팔당댐 건설과 같은 거시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마을주민들의 삶의 모습과 풍속, 전통문화인 미시적 역사가 자연스럽게 맞물려 지금의 마재마을을 만들었다.
처음에 밝혔듯이 스토리텔링은 그 지역의 삶과 문화가 녹여져 있던 것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발굴하고, 활용하여 지역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마재마을은 이제 ‘말이 고개를 넘는 마을’이라는 이름 외에도 실학을 통해 역사의 변화를 넘어선 마을로서 다시금 재조명될 수 있는 계기가 경기도문화원연합회와 경기학연구팀의 ‘마을조사사업’을 통해 마련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란 이 한 권의 책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는 단순히 연구백서에서 머물지 않는다.
경기북부 남양주의 작은 마을인 마재마을이 다산문화제와 다산연꽃축제, 다산묘제 등 우리의 전통 문화를 지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을 알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편찬의 의의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마을 주민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과 나주 정씨 일가의 이야기, 그리고 마을 역사의 변천 과정에 대한 연구 등이 유기적인 관계로서 보다 쉽게 마재마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어, 지역스토리텔링을 공부하는 학자나 문화 스토리텔링 종사자들에게 좋은 활용 자료라 생각된다.
기록이란 스토리텔링의 원천 소재이자 중요한 초석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경기마을기록사업]은 잊혀져 가는 시대적 역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마을의 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방향키가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천편일률적인 마을 축제나 지역 축제 등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지역 고유의 역사성과 개성을 지키는 지침서로서 계속된 연구, 발굴에 힘써주길 바란다.
끝으로 마을 곳곳에 숨겨진 문화콘텐츠 발굴로 보다 넓은 세상에서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사업이 함께 이루어지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