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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서평> <정책/이슈>
칠지도 명문 해독을 고찰해 본 백제의 대외 관계1)

 

 

 


윤 한 택 문학박사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부에 위치하여 유사 아래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 중심부에 위치한 경기도는 구석기, 신석기 등 선사시대부터 한강과 임진강을 낀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일찍이 문명을 일구어내었고, 고대에서는 삼국의 쟁패지로서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는 중세에서는 문벌귀족, 권문세족, 신흥사족의 근거지로 국가 경영의 중심을 이루어 왔고,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자생적으로 근대화의 싹을 키워온 거점이기도 하였다. 
  
 두 번의 세계 전쟁을 경험하며 가파른 20세기를 살았던 근대 인류에게 핵심적인 관심사는 경제와 정치였다. 그런데 그 세기 말로 치달아가면서 그 핵심 고리를 쥐고 있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냉전 체재가 현상적으로 해소되고 세계적 교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다양한 생활 영역에서 기존의 수직적 구조가 수평적 구조로 점차 이동하는 변화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문화의 중요성이 점차 커져갔고, 집단이든 개인이든 그 개성이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고, 경기도도 이런 흐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문화의 일선 담당 조직인 문화원도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고, 그런 맥락에서 기관지 경기향토사학을 통하여 경기도 문화원형에 대한 연구 논문을 꾸준히 연재해왔다. 이런 성과를 다시 문화뜰이라는 형식으로 재검토하고 대중화하려는 이번의 문화원형 재평가 사업도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경기도는 한국 고대 국가의 중요 활동 무대였고, 유라시아 대륙 문명을 전달하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그 중 백제는 이 시기에 세계 역사상에서 그런 역할을 수행한 중요한 주체 중의 하나였다. 경기향토사학이 이번 호에서 백제와 일본 사이에 관련된 대표적 유물인 ‘칠지도’를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칠지도는 현재 日本 奈良縣 天理市 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철제의 도구이다. 전체 길이는 약 74.9cm인데, 몸통 길이 65cm와 자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래에서 1/3 되는 지점이 잘려나간 상태이다. 몸통 좌우로 3개씩의 가지가 끝부분 쪽으로 서로 어긋나게 붙어 있다. 좌우의 가지가 6개여서 원래 신궁의 장부에 육차모(六叉鉾)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새겨진 글자가 발견되면서 칠지도로 불리게 되었다. 
  
 몸통의 앞면과 뒷면에는 금으로 새겨 넣은 글자가 있는데 앞면 34자, 둿면 27자 총 61자이다. 몸통에 녹이 슬어 있고 새김이 떨어져 나가 읽어내기가 무척 어려우며 확실한 글자는 20여 개에 불과하다. 글자의 모양은 해서, 예서, 행서가 섞여 있다. 글자 내용은 연대, 명칭 등과 백제와 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으로 되어 있다. 
  
 그 새겨진 글자는 1873년에 이 신궁의 관리였던 管政友가 공개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글자를 읽어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연호로 추정되는 글자를 바탕으로 『日本書紀』 神功紀 52년 조의 칠지도라고 보고, 백제가 왜에 헌상한 것이라는 해석이 등장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이 확산되며, 해당 시기에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식민지를 설치하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역사적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북한의 김석형이 고대 동아시아에서의 한반도와 일본의 국제 관계에 주목하며 삼한과 삼국이 일본 섬 안에 일종의 지방 정부인 ‘분국’을 설치하였다고 주장하고, 칠지도는 백제왕이 그 지방 정부의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 학계에서는 당시 백제의 종주국이었던 동진(東晋)이 백제를 시켜 왜에게 주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동아시아 국제 관계, 제작 시기, 제작 주체, 제작 동기 등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다.
  
 칠지도에 대해서는 해당 유물의 재질, 기법 등에 대한 예술적, 문화적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새김 글자의 내용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었고, 자연히 한반도와 일본의 국제 관계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우세하여 다분히 소모적인 측면이 없지도 않았다. 그것은 근대 한일 관계가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불행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되었고, 또 칠지도와 관련된 시기의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점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경기도의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해 온 안국승1) 선생의 칠지도 관련 논문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이 부분 연구의 진전을 위한 새로운 제안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지명과 신화나 전설 연구, 고고학적 연구, 당시 국력과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백제의 요서 경략설’에 대한 검토 등이 제안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문화와 개성이 중시되는 새로운 역사 시대를 맞이하며, 문화 원형에 주목하는 추세에 발맞추어 더 시야를 넓히는 노력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된다. 예컨대 글자 판독 및 해석뿐 아니라 글자 모양의 변화를 통한 예술·문화적 검토를 아울러 진행한다든지, 재질의 원료, 제작 기법, 유형, 사용된 새김 기법 등에 대한 보다 정밀한 물리·화학적 검토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들 성과를 바탕으로 관련 유적지를 조사 발굴하여 복원하여, 이들을 문화 브랜드화한다거나 지역 축제로 재구성하는 사업도 진행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사업에는 반드시 엄밀한 고증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1) 안국승, 1996, <<질지도 명문 해독을 고찰해 본 백제의 대왜관계>>, <<경기향토사학>>, 제1집, 한국문화원연합회경기도지회


판독문 (관련 기초 자료 붙임)  
앞면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后王 □□□□2)作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해독문-
  
앞면 
泰和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七支刀를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兵害를 물리칠 수 있고 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가 만든 것이다.
  
뒷면 
先世 이래 아직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百濟王世子가 뜻하지 않게 聖音이 생긴 까닭에 倭王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할 것이다.
< 日本書紀> 
卷第九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 久氐等從千熊長彦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仍啓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飮是水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 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雖死何恨 自是後 每年相續朝貢焉 

 52년 가을 9월 丁卯 초하루 丙子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보고하기를,“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하늘의 은혜를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특산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고 말해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2) □□□□ : 칠지도의 글씨가 닳아 흐려져 판독할 수 없는 한자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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